▲ 필자의 마당에 있는 까치감(까치밥).

허허로운 11월 말, 까치감 하나가 발갛게 등불을 밝히고 있다. 필자의 채전밭에는 아침마다 까치 한두마리가 감나무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간다. 그러다가 문득 빨간 하트 하나만 오롯히 남은 아침, 불을 훔친 죄로 간을 쪼아먹힌 프로메테우스는 촛불처럼, 심장처럼 마지막 까치감을 푸른 하늘에 내놓고 까치를 기다린다.

프로메테우스처럼 감나무가
붉은 심장을 꺼내
쪼아 먹히길 기다리고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심장은 다시 자랄 것이다
‘까치밥’(이기영)

까치는 귀한 사람이나 손님을 알려주는 반가운 새다. 신라 남해왕 때(기원전 5년) 계림(경주)의 동쪽 아진포(양남면)에 한 척의 배가 도착했다.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할머니가 까치들이 울어대는 곳을 찾아가 보니 배 안의 궤에서 어린 아이와 일곱 가지 보물이 나왔다. 이 때부터 까치는 손님의 내방을 알려주는 전령사가 됐다.

남해왕은 그 청년을 만나본 즉 인물이 출중해 직접 이름을 지어줬다. 까치들이 무리지어 우는 와중에 태어났다고 까치 ‘작(鵲)’ 자의 ‘새(鳥)’를 날려버리고 ‘석(昔)’자만 취해 성(姓)으로 삼았다. 또 궤가 열리고 알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줬다.

▲ 이재명 논설위원

까치만큼 우리 민족과 친숙한 것도 없다. 아득한 수평선 끝에 붉게 타는 ‘까치놀’, 발꿈치를 들어올려 무엇인가 살펴보는 ‘까치발’, 쑥대머리같은 헝크러진 머리 모양을 이르는 ‘까치집’…. 청도 운문사는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중창됐다. 후삼국의 전란으로 운문사가 파괴된 뒤 고민하던 보양스님은 어느날 까치가 쪼는 곳을 팠는데, 여기서 탑을 쌓을 전돌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울산의 가지산은 운문산 주위에 까치가 하도 많아 ‘까치산’으로 불렀다는 석남사측의 이야기도 있다.

까치는 한 때 20여개 시와 15개 군이 대표 새로 삼았다. 그러다가 유해조수라는 딱지가 붙자 그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까치는 석탈해 이전부터 맛있는 감을 먹고, 잠자고, 아침에 깨어나 깍깍 우는 삶을 살아왔다. 감이 달다는 것, 그 여여(如如: 있는 그대로의 상태)한 마음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공연히 인간이 이랬다 저랬다 할 뿐.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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