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북부 산악지역에 사는 부족들에게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는 마을 전통이 있다고 한다. 바로 손자가 태어나면 할아버지가 밀로 술을 빚어 애지중지 오랫동안 묵혀두었다가 드디어 손자가 커서 혼인을 할 때 혼례식 축하주로 쓴다고 한다. 이 밀 술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침으로 담근다고 한다. 고산 부족들은 고립된 지역에서 살고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효모와 같은 발효제를 구할 수가 없어서 손자를 본 할아버지가 그날부터 여러 날 밀을 입으로 정성스럽게 씹어 항아리와 같은 용기에 뱉어 술을 빚는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술이 약성이 좋아 이를 아는 외부 사람들이 많은 돈을 주고라도 사려고 하는데 웬만해선 팔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리 어렵고 돈이 필요하더라도 손자 결혼식에 쓸 것이니 팔지 않겠다는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과 애틋함이 역력하다. 은행나무를 한자어로 공손수(公孫樹)라고 한다. 여기선 손(孫)은 손자나 후손을 뜻하며 이는 은행나무는 손자 대에 가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는 뜻이란다. 자기 대에는 먹지 못할 수도 있는 나무를 왜 심을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손자와 후손들이 조금이라도 이 나무의 덕을 보라고 심는 것이다. 즉, 은행나무(公孫樹)는 손자를 위해 심는 나무라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예전에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집 안에 심었다고 한다. 정성으로 심고 애면글면 보살피면서 키워 딸이 다 자라서 시집을 갈 때 그 오동나무를 켜서 좋은 장롱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 주변은 얼마든지 돈으로 좋은 술과 열매를 구할 수 있고 화려하고 튼튼한 혼수품들을 살 수 있는 풍요롭고 좋은 세상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정성과 사랑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 어느 때보다 밀과 침으로 만든 술이나 후손들을 위해 심는 오동나무와 은행나무들과 같이 금은보화에 비교할 수 없는 선조들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유산이 필요한 때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360년 묵은 간장으로 음식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간장은 전라남도 담양에 뿌리를 둔 장흥 고씨 양진재 문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간장이라고 한다. 이 문중에 내려오는 선조들의 유산이 미국보다 오래된 간장이라는 화제로 세계를 놀라게 했고 결국 대한민국의 역사를 세계에 새롭게 알리는 역할까지 했다.
사실 간장도 50년 이상 잘 묵히면 약성이 풍부해져 단순히 양념이 아니라 좋은 약으로도 쓸 수 있다고 한다. 고추장도 10년 20년 이상 보관을 잘하면서 숙성을 시키면 맛도 맛이지만 약성이 강해져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좋은 식재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으니 손자 손녀들이 태어난 그해에 난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된장을 담근 후 이 된장으로 간장을 빚고 또 잘 말린 태양초를 더해 고추장을 만들어 정성으로 숙성을 시켜 20년 30년 후에 손자 손녀들이 결혼할 때 내어 손님들을 대접하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또 씨 간장으로 남겨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도록 하면 아마도 그 어떤 것보다 더 멋진 선조들의 유산이 될 것이다.
우리도 어느 정도 풍요로운 시대를 살다 보니 많은 사람이 돈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려고 한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마다 귀찮다고 한다. 힘들어서 할 수 없다고 한다. 돈을 줄 테니 사서 하라고 한다. 쉽다면 쉽고 편리하다면 편리하다고 할 수 있지만, 후대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어느 때보다 시간과 정성이 담긴 것들이 그 무엇보다 귀한 유산이 될 수 있는 시대다.
사랑과 정성과 세월이 담긴 유산을 찾기 힘든 시대지만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친구를 찾아다녔다는 철학자처럼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문의 유산으로 삼을 만한 것들을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이웃 일본 어느 음식점에는 천년을 내려오는 가문 비법이 있다고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도 눈앞에 보이는 재물보다 후손들에게 천 년을 물려줄 수 있는 정성스러운 유산과 유업을 만들어 가야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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