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태화루와 울산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의 ‘누정’조에 기록된 대화루(大和樓).

신라 역사속 ‘대화사’로 첫 등장
신증동국여지승람서 자장이 세워
통도사 건립 646년 언저리로 추정

고려·조선때 문헌에 ‘대화루’로
1401년 중건·1485년 제2의 중건
1561년에 편액 글귀 새긴 기록도

16세기말 이후 문건에서 사라졌다
1735년 청대일기 ‘태화루’로 등장
2014년 S-OIL 지원으로 재건 완료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은 1454년에 완성되었다. 그 일부인 <세종실록지리지>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전국지리지이다. 그 중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 편에서는 먼저 울산의 역사, 인구, 성씨, 산업을 개관한다. 그리고는 간략하게 지리를 소개한다. 건물로는 대화루(大和樓)와 망해대(望海臺) 둘 뿐이다.

기록은 간략하다. ‘大和樓望海臺 皆在郡西’. 대화루와 망해대가 있는데 모두 군 서쪽에 있다는 것이다. 망해대는 문수산 망해사 옛터에 가까이 있었다 하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대화루는 지금의 태화루 자리에 2014년 4월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지금은 태화루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대화루였다.

대화루는 <고려사>에도 나타난다. 997년(성종16) 8월에 왕이 개경을 떠나 경주로 행차했다. 사면령을 반포했으며, 지나가는 길에 위치한 주현의 조세를 절반으로 감면했다. 9월에는 흥례부 즉 울산으로 이동했다. 대화루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바다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 같은 내용이 <고려사절요>에 더 상세히 실려 있다.

▲ <세종실록-세종실록지리지> 속의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 대화루(大和樓)는 왼쪽 끝 줄에 보인다. 大和樓望海臺 皆在郡西.

고려의 문학작품에서도 대화루를 만난다. 정포(1309~1345)의 문집인 <설곡집>에 실린 “울주팔경” 시의 하나로 ‘대화루’가 있다. 이를 차운한 이곡(1298~1351)의 시 ‘대화루’는 <가정집>에 수록되어 있다. 김극기가 대화루를 읊은 시서(詩序)는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 <승람>으로 약함)에 남아 전한다. 고려 명종(재위 1170~1197) 당시에 문명을 떨쳤던 그의 시를 통해, 대화루의 역사는 아득한 신라시대로 연결된다. 법을 구해 중국에 갔던 자장국사가 643년에 경주로 돌아왔다. 남해안을 거쳐 태화강으로 올라온 자장은 사포(絲浦)에 닿았고, 여기서 쉬면서 터를 잡아 대화사(大和寺)를 세웠다는 것이다. 김극기는 “대화사 누각에 공경대부와 고승과 위대한 은자들이 먼 지방을 지척같이 여기어 그윽한 경치를 찾아 서로 노래하고 서로 화답”했다고 읊었다. 이로써 대화루가 대화사로 연결된다.

<삼국유사> ‘탑상’편 ‘9층탑의 영험’조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황룡사 기둥, 통도사 계단, 대화사 탑에 나누어 안치했다고 기록했다. 대화사 탑에 사리가 안치된 것은 언제였을까. 황룡사 9층탑과 통도사가 세워진 646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부처의 가호로 외적을 막고 불법을 빌어 국가를 통합하고자, 황룡사 9층탑과 통도사에는 완공과 함께 사리가 봉안되었을 터. 대화사에도 비슷한 시기에 사리가 안치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대화사가 이즈음에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그 누각인 대화루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세워지지 않았을까.

대화루는 그 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쇠락했다. 몽고의 침입 등 병화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대화루는 1401년에 중건되었다. 앞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대화루는 바로 이렇게 중건된 대화루이다. 중건에 즈음하여 권근이 ‘대화루記’를 썼다. 위에서 본 김극기의 시서(詩序)와 함께, 권근의 ‘대화루記’도 <승람>에 소개되어 있다: ‘…신라 때에 비로소 절을 이 북쪽 언덕에 세우고 대화라 하였는데, 서남쪽으로 누각을 이루었고 아래로는 못에 임했으며, 산은 들 밖으로 비껴나가고, 바다는 하늘가에 닿아 있어 여기 올라가 구경하는 아름다운 경치가 가장 기이하고 빼어나다…’ 여기서 말하는 서남쪽의 누각이 바로 대화루이다.

1485년에 대화루는 중신(重新) 즉 제2의 중건을 거친다. <승람>에 수록된 서거정의 중신기를 보자: “…울산 강에 이르러 한 누각을 바라다보니, 층층으로 언덕과 끊어진 절벽 위에 높다랗게 서있어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고 있는지라, 그 웅장한 것을 사랑해서 물으니 대화루라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로부터 76년이 지난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발간되었다. 중신(重新)된 대화루는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의 ‘누정’ 조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고을 서남쪽 5리에 있다. 고려 성종이 동경으로부터 흥려부를 지나다가 대화루에 거둥하여 여러 신하들과 잔치를 열고 서로 수창(酬唱)하며, 또 바다에서 큰 고기를 잡았는데, 이로부터 왕이 몸이 편치 않아 서울에 돌아와서 드디어 훙(薨)했다.” 여기서 동경과 서울은 각각 경주와 개경을 뜻한다.

1561년,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도 대화루가 등장한다. 그는 사간원 정언과 승정원 승지를 역임한 중종~명종 대의 관리이며 학자였다. 사후에 우암 송시열이 그의 행장을 썼다. 1561년 윤 5월20일 이문건은 ‘書大和樓額’라 기록했다. 대화루 편액의 글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어서 8월14일에는 “大和樓額一褁幷封送之”라 썼다. 대화루 편액 글자를 하나의 자루(褁)에 동봉하여 보냈다는 것이다. 자루에 동봉한 것은 건어물이며 받는 사람은 신국주라는 사람이다. <묵재일기>에 의하면 얼마 후 신국주는 “경주 농소”에 다녀와서 별세했다. 필자의 지식이 얕은 탓으로, 여기서 말하는 대화루가 울산의 대화루인지는 불분명하며 더 조사를 요한다.

16세기말 이후, 대화루는 문헌에서 사라진다. 그간 임진왜란의 병화가 울산을 휩쓸고 지나갔고, 어느 때인가 대화루는 무너져 없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다가 권상일의 문집인 <청대일기>에서, 대화루는 태화루(太和樓)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그는 1735년 4월부터 1737년 12월까지 울산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1736년 일기에서, 태화루로 가서 활쏘기 시합을 주관하는 등 세 곳에서 태화루가 언급된다. 태화루 위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1749년에 발간된 사찬 울산읍지인 <학성지>에는 “太和樓今廢”라 기록되었다. 즉, 태화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이후 1786년 <울산부 여지도 신편읍지>, 1832년 <여지도서 울산부읍지>, 1871년 <영남읍지>에서 태화루는 대략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태화루는 부(府) 서쪽 5리 되는 곳 황룡연 위에 있어 많은 선비들이 와서 시문을 읊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누호를 학성관 남종루에 옮겨 걸었다. 1899년 울산군읍지에서는 이런저런 설명도 없이 그저 “태화루는 동헌 객사 앞에 있다”고 기록했다.

태화강은 반구대에 고래와 호랑이가 암각되던 원시의 시대로부터 울산의 들을 적셨고 선인들은 그 언덕에 태화루를 세웠다. 아스라한 신라의 역사에 등장한 태화루는 명멸하는 세대를 거치며 허물어졌다가 세워졌다를 반복했다. 울산사람은 랜드마크 태화루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했고 허물어진 터를 보며 그 옛 모습을 마음자락에 새겼다.

▲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태화루는 기박산성에서 창의한 울산의 임란의병들이 왜군을 맞아 피흘리던 현장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일본으로 향하던 통신사 이예는 고향 언덕 태화루를 뒤돌아보며 삼호나루와 웅촌의 옛길을 걸었을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용어 시소러스>는 촉석루, 영남루, 부벽루, 태화루를 “조선 4대 명루”로 소개한다. 이 명루가 4백여 년의 “太和樓今廢”를 딛고 2014년 재건되었음은 참 다행한 일이다. 이때를 놓쳤더라면 울산은 또 언제까지 “太和樓今廢”의 옛터를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재건을 위해 용단을 내린 울산광역시, 오랜 기간 열정으로 수고하신 울산의 문화계·학계 인사들, 그리고 건립비 전액을 기부해 준 S-OIL에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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