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지난 7일 대설(大雪)을 기하여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고드름이 매달리고 땅에는 서리가 치는 계절, 바야흐로 겨울이다.

대설과 동지가 끼어있는 음력 11월은 농한기가 시작되는 시기다. 농한기를 다른 말로 ‘겨를철’이라고도 하는데, ‘겨를’은 바쁜 가운데 얻는 틈을 이른다. ‘일철’ ‘겨를철’은 농부의 말이고, ‘농한기’ ‘농번기’는 구경하는 도회지 사람들의 말이다.

11월은 중동(仲冬:겨울을 삼등분한 달의 둘째 달)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가을에 거둔 곡식 얼마나 하였던고/ 몇 섬은 환(換:환곡)하고 몇 섬은 왕세(王稅:국세)하고/ 얼마는 제반미(祭飯米:제사에 쓰일 햇 멥쌀)요 얼마는 씨앗이며/···/ 시비(柴扉:사립문)를 닫았으니 초옥이 한가하다/ 단귀에 조석하니 자연히 틈 없나니/ 등잔불 긴긴 밤에 길쌈을 힘써 하소/ 베틀 곁에 물레 놓고 틀고 타고 잣고 짜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조선시대 실학자 정학유가 지었다. 일년 동안 해야 할 일을 달의 순서에 따라 서술한 것으로, 백성들은 가사를 박자에 맞춰 흥겨운 노래로 승화했다. ‘월령(月令)’이란 매달 할 일을 적어놓은 행사표를 말한다. 메주쑤기, 동지팥죽 해먹기, 가축 기르기, 거름 준비 등 농촌생활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농가월령가와 비슷한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라는 것도 있다. 농가월령가를 한역한 것이지만 많은 부분이 첨삭돼 읽는 재미가 새롭다. 농가월령가는 내용의 순수함이 돋보이는 가사인데 반해 농가십이월속시는 사회성을 대폭 가미했다. 조선 말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을 애절한 한시로 읊었다.

▲ 농가월령도 11월령.

이 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 갈단새(밤에 울며 새벽을 기다리는 새)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 염교(주로 장아찌로 담가 먹는 식물)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산사람 입에는 거미줄 치지 않으니/ 아침 저녁 겨우 먹어도 고달프다 않는다네/ 때때로 모여 앉아 술 마시기 어려워서/ 주린 배에 담배 피며 부질없이 푸념하네···.

대설을 지나면서 곳곳에서 눈이 자주 내리고 있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라고 했던가. 푸른 보리는 그렇게 하얀 눈 이불을 덮고 긴 겨울을 인내하고 있다. 아랫목 온기를 품은 ‘겨를철’의 숨은 기다림처럼.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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