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4. 물밑에 가라앉은 추억(중)

▲ 고분군 모식도.

청동기 시대부터 마을 형성
대곡천, 감입곡류 하천 원형 간직한 곳
들판엔 벼농사를 산밑엔 주거단지 형성
삼한~삼국~조선 유물 1만3천여점 출토

대규모 하삼정 유적·고분군
주거지·석곽묘·도로유구등 1천기 발견
경주 주변서 가장 규모 크고 밀집도 높아
무덤위 무덤…시대별 고분 변천사 한눈에

물 밑에 가라앉은 두동면 구미리 양수정 마을, 삼정리 상삼정 마을, 삼정리 하삼정 마을, 천전리 방리 마을, 두서면 서하리 구석골 마을은 동네 사람들과 소, 개, 닭들만 없지 그대로 있다. 논과 밭, 하천, 개울, 솔숲, 빨래터…. 지금도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무줄 놀이하는 여자애들의 단발머리가 나풀나풀 나비처럼 날고, 머슴아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제기차기로 오후를 보냈다.

아이들이 놀던 그 땅은 청동기 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았다. 북쪽에 고조선이 한창 부흥할 때 남쪽 울산의 대곡천 인근에는 고대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강력한 정치집단을 형성했다. 하삼정 고분군의 목곽묘에서 나온 비늘갑옷과 큰 칼(大刀), 쇠화살촉, 주머니칼 등을 보면 그 당시 대곡천 사람들의 무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돌방무덤.

한국문화재보호단이 지난 2000년 3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5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곡천변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삼한~삼국시대 고분군, 통일신라시대의 절터·건물터·석축유구와 기와가마·토기가마, 조선시대의 건물지·기와가마·분청사기가마·백자가마·옹기가마·제련로 등이 조사됐다. 유물은 무려 1만3000점이 출토됐다.

대곡천변 청동기인들이 집단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들판에는 벼농사가 시작됐으며, 산 밑에는 집이 지어졌다. 마을들은 대부분 산을 배경으로 산록에 형성됐다. 대곡천이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흙을 뒤쪽으로 쌓아올려 마을의 대지를 형성한 것이다.

▲ 고분군 전경.

뱀처럼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나아가던(자유곡류) 대곡천은 하천 바닥을 계속 침식하고 산이 막히면 바위벽을 깎아 내었다. 그래도 안되면 다시 방향을 바꾸어 산 사이로 빠져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하천을 ‘감입곡류’ 하천이라고 말한다. 대곡천은 감입곡류 하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대곡천변 청동기인들이 남겨놓은 유물들은 고조선 유물들과 흡사하다. 가장 흔한 농기구인 반달돌칼은 두 개의 구멍에 줄을 끼워넣어 손을 잡은 뒤 벼를 베는데 사용했다. 하삼정에서 나온 돌화살촉은 수렵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밖에도 민무늬토기, 바리모양토기 등은 곡식을 담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곡천의 범람이 만든 비옥한 들판에서 청동인기들은 강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했다.

▲ 오리모양토기.

하삼정 일대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발굴조사팀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점점 드러나는 방대한 규모의 고분군에 경악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7동, 목곽묘(나무덧널무덤) 129기, 석곽묘(돌덧널무덤) 797기, 석실묘(돌방무덤) 35기, 옹관묘(독무덤) 9기,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2기, 도로유구 등 약 1000기가 발견됐다.

하삼정유적과 고분군은 지금까지 경주 주변에서 조사된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고, 밀집도도 높았다. 이들 무덤을 잘 살펴보면 청동기인들이 무덤을 만든 이후 그 위에 또 신라시대 사람들이 무덤을 만드는 등 무덤들이 이중삼중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굽다리 접시.

발굴팀은 “2~7세기의 신라시대 묘제가 조사돼 목관묘·목곽묘·석곽묘·석실묘로 이어지는 고분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신라시대 때 대곡천변 하삼정은 신라 왕경에 포함되는 사량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은 오리모양토기(압형토기), 긴목항아리(대부장경호), 화로모양토기(노형토기), 신선로 모양토기, 굽다리접시(고배), 쇠투겁창(철모),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쇠도끼(철부), 쇠낫(철겸), 쇠화살촉(철촉), 금동관, 귀걸이, 목걸이 등 다양했다.

▲ 집터.

부장품의 종류로 볼 때 이 묘들은 단순한 묘가 아니라 이 지역에 강력한 정치집단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 정치집단은 신라시대 때까지 점점 그 힘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목걸이.

한국문화재단 발굴팀은 “대곡댐 편입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과거 대곡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대곡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돼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공간으로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양수정, 삼정리, 방리 마을 사람들은 댐에 물이 차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자신이 살아왔던 땅이 어떤 땅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대곡천변 청동기인의 후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 수정 목걸이.

청동기시대에도 아이들은 그 대곡천변에서 여름철 물놀이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시대, 조선시대에도 아이들은 봄철 화사하게 피는 꽃을 구경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 하삼정 마을 땅 속 석곽묘 또는 석실묘 등에 잠들었을 것이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사진 출처=대곡박물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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