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③

▲ 라오스 불교사원 건축의 백미인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사원으로 손꼽히는 왓 시엥통 사원.

불교사원 건축의 백미 왓 시엥통은
디자인의 완결미로 타의추종 불허

수행자이며 봉사자인 라오스 승려는
침탈과 핍박에도 불교 생존의 원동력

새벽 탁발행렬…나눔으로 행복한 시간
부처와 더불어 사는 도시 꿈꿨을듯

라오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남부에 살던 라오족으로서 태국의 치앙마이와 같은 뿌리에 도달한다. 국가로서 라오스의 시작은 멀리 잡아도 14세기의 일이니 우리네 조선시대의 시작과 비슷하다. 동남아시아에서 신성하고 유용한 동물로 여기는 코끼리가 많이 살고 있었던 탓인지 나라이름도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의 란쌍(Lan Sang, 또는 Lan Chang)으로 정했다. 그 수도는 오늘날의 루앙 프라방이었다.

루앙 프라방은 메콩강 상류에서 남칸 강이 흘러드는 장소에 위치한다. 중앙에는 푸쉬라는 이름의 가파른 산이 경계를 서고, 두 강줄기가 자연 해자를 이루니 한 나라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도시가 강줄기를 껴안는 것은 비단 방어의 유리함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교통로가 되고,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수원이 되고, 민물고기의 생산지가 된다. 강은 배수로인 동시에 수경을 갖춘 아름다운 도시경관을 만들기도 한다.

왕국을 창건했던 초대 왕 파응움(Fa Ngum)은 크메르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그의 장인은 선물로 불교경전과 프라방(Pra Bang) 불상을 보냈는데, 이는 스리랑카를 발원지로 하는 상좌부 불교의 전래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크메르를 비롯한 주변 강대국에서 전파된 힌두교와 토속신앙들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국교화되고 불교건축이 융성하게 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당시의 도시 모습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왕궁을 중심으로 불교사원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불교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황금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탓인지 도시 이름도 ‘시엥통’ 즉 ‘황금의 도시’라고 불렸다. 황금빛으로 찬연했던 사원들의 모습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17세기 유럽인들은 당시의 사원을 보고 이렇게 묘사했다. ‘거대한 피라미드로서 정상부에는 천여 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나뭇잎으로 덮여 있다.’

역사유산이 몰려있는 루앙 프라방의 중심구역은 산책할 수 있을 만큼 작은 구역이다. 중심대로를 따라 뒷짐 지고 걸어봤자 채 20분도 안되어 끄트머리에 다다른다. 그 거리에는 크고 작은 사원들이 주택들 사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마치 치앙마이 성안의 모습과 유사하나 고즈넉한 주택가처럼 사원과 주택이 어울려 있다. 집집마다 열대식물로 집주변을 가꾸어 강렬한 색조의 꽃과 향기가 가득한 가로는 잘 꾸민 정원을 걷는 듯하다.

왓 시엥통은 라오스 불교사원 건축의 백미인 동시에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사원에 손꼽힌다. 16세기에 건립되어 최근까지 왕실사원으로 사용된 이곳은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치러지는 성전이었다. 이곳에서 대관식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왕실 장례 및 왕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사원 안의 한 건물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장례운구차를 보관하고 있다.

태국식 사원에 비하면 본전 건축은 크기도 화려함도 모자란다. 거창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는 적절한 규모에 어지러울 정도의 장식성도 없다. 하지만 디자인의 완결미는 어떤 사원보다도 탁월하다. 한 눈에 들어오는 적절한 규모는 보석처럼 응축적인 미감을 강화시킨다. 번잡함이 없는 장식이기에 오히려 세부를 주목하게 만든다.

굳이 양식을 분류한다면 본전은 태국식 불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부분의 형상이나 구성은 어떤 태국사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미학을 갖는다. 몸체를 덮을 정도로 육중한 지붕은 태국건축에서 볼 수 없는 비례감이다. 그 육중한 지붕을 5단 3층으로 분절하여 시각적으로 날렵하게 만들었다. 분절된 지붕은 늘씬하고 유연한 곡선으로 처리하여 용마루를 향하여 솟구친다. 과도하게 치켜 올라간 중국 남방식이 아니라 한옥의 지붕곡선처럼 완만한 곡선이다. 지붕 마구리에는 봉황처럼 늘씬한 나가가 하늘로 날아오를 자세를 갖는다.

벽면의 장식은 금색으로 휘황찬란하다. 붉은 바탕 위에 금박으로 수를 놓아 왕실의 기품을 표현했다. 예고라도 하듯 내부공간도 외벽과 같은 금박 문양들로 부처의 공간을 수놓았다. 천정은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슴과 법륜그림으로 마감하였다. 가히 바로크 성당의 천정화와 비교할 만하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라오스 불교는 수많은 외세의 침탈과 핍박 속에서도, 공산주의의 탄압 속에서도, 심지어 기독교 서구문명의 유혹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거창하고 화려한 사원건축 때문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상좌부 불교의 핵심인 승단(상가)이 있었다. 그들은 1980년대 이후에도 전통적인 역할을 확장해 왔다. 태국에서 승단의 역할처럼 그들도 사원에 들어 앉아 수행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불법의 수행자인 동시에 사회의 봉사자로 지역 주민들과 함께 했다. 교사가 없는 곳에서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고, 의사가 없는 곳에서 진료를 맡았다. 불교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라오 언어와 다른 과목들도 가르쳤다. 그들은 사원과 수도원의 수호자인 동시에 전통문화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신자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들에게 아침마다 공양을 바치는 행위는 선업을 쌓는 신자들의 기쁨이기도 하다.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주택가 골목은 공양물을 앞에 놓고 기다리는 주민들의 경건한 침묵으로 깨어난다. 멀리서 주황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의 탁발 행렬이 다가온다. 여명 같은 침묵의 행진 속에서 무한한 대화가 들려온다. 무엇을 염원하여 새벽잠을 버리고 꿇어앉은 것일까? 주는 사람은 행복하고 받는 사람은 감사하다. 가난하지만 나눌 수 있다는 행위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들은 부처와 나누고, 더불어 사는(shared) 도시를 꿈꾸었으리라.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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