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엄마, 아버지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을 해요. 내가 더 자주 올 테니까….” 그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그렇게 말을 합니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는 노모를 업은 채 논두렁길을 걸어갑니다. 두 손에는 노모의 앙상한 엉치뼈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벌써 이번이 네 번째. 요양원에서 걸려온 전화, 사라진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 네 번 다 똑같은 행보였습니다. 노모는 그의 등에 한쪽 뺨을 기댄 채 말없이 업혀 있습니다. 무겁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 놓칠 것만 같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봄비를 싫어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얇은 대나무로 만든 우산살과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던 초록색 비닐우산을 쓰고 학교에 가야만 했고, 그 초록색 비닐우산이 창피했습니다.

또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다니는 택시회사에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머니와 그는 예의 그 초록색 비닐우산을 쓰고 걸어갔습니다. 한데, 회사 정문에 막 도착했을 무렵, 어머니는 갑자기 초록색 비닐우산을 내려 그의 얼굴을 가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반투명하게 보이는 초록색 비닐우산 너머로 자신의 아버지가 택시회사 사장에게 계속 뺨을 맞고 있는 걸 똑똑히 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굳은 듯 그렇게 오랫동안 비를 그대로 맞으며 그의 정면을 우산으로 막아 주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어머니가 자신의 시야를 가려준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후에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들이 아닌,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맞다가 행여 아들을 볼까봐, 그러면 정말 아버지가 못 견딜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한 거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차례 세찬 바람이 지나가더니 훌렁, 우산이 뒤로 넘어가고, 그는 논바닥 아래로 굴러 떨어진 우산을 한동안 내려다봅니다. “영감, 왜 이렇게 비를 맞았소?” 그의 등 뒤에서 노모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노모는 자신이 입고 있던 누비 점퍼를 벗어 둥글게 우산처럼 그의 머리 위로 펼칩니다. 아무 말 없이 계속 그의 머리 위를 누비 점퍼로 가려주고 있던 노모가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영감, 아무래도 감기 들겄소.”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가슴 아픈 봄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박서영 시인의 ‘업어 준다는 것’이라는 시를 읽다가 생각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이기호 작가의 ‘봄비’라는 소설입니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12월에는 이 두 작가의 글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괜찮았다고, 내가 사랑한 사람들에게 “어부바, 업어줄게”하면서 한 번 업어 주면 어떨런지요?

업어 준다는 것은 따뜻하고도 슬픈 일. 내 생의 무게를 누군가 덜어 준다는 것. 심장 두 개가 나란히 겹쳐져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는 것. 그러면 그 어떤 걱정도 다 사라질 것 같습니다.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