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의 깊은 밤은 그 모습이 심오하다. 더구나 미녀의 속눈썹과도 같은 초생달이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을 때의 산촌이란 더욱 그러하다. 왠지 모를 신비한 무엇과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 계곡에서 들리는 시원한 물소리, 이미 분간할 수 없는 많은 풀벌레 소리들은, 무어라고 할까, 자연이 내는 어떤 소리들의 폭포인 것 같다.

 하기야 산골의 이 밤은 이렇게 탈속의 느낌을 충분히 주고 있지만, 정오의 모습들은 사뭇 달랐었다.

백우선 부쳐대기도 귀찮아

숲 가운데 가 벌거숭이 어떤가

건 따위 벗어 돌에 걸어버리고

맨머리에 솔바람이여

 당나라 민중시인 이백의 "夏日山中(하일산중)"의 한 구절이다. 이백은 여름의 더위 속에서 이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율과 도덕을 넘어서 있는 자유와 분방의 높은 경지를 노래한 것이다. 우리는 이백이 그러한 것처럼 물 속의 달을 향해 빠져죽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위 "여름날 산중"의 경지를 생각하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어쩔 수 없는 현대 소시민의 한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더웠던 한 낮이었지만, 지금은 복잡한 세상사를 다 잊은 느낌일 뿐이다.

 여하간 이번 여름휴가를 산중 깊은 곳에서 하릴없이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밤이 되니 차가운 공기에 모기조차 없어져 귀찮은 모든 생각이 다 없어진다. 모처럼 인공 불빛이 없는 적막한 어둠에 쌓이게 되니 도회지 세속의 복잡다단한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문명은 명백히 생산에서 소비로, 노동에서 여가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울산에는 아직도 노사갈등의 문제가 상존하고 있지만, 사실 생산과 노동의 시대가 거하고 있는 마당에 노동운동은 이미 과거사 일인 것이다.

 사회학의 이러저러한 이론을 넘어 벌써 세상은 적절한 휴가없이는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여가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인간은 노동함으로써 자아를 완성하고, 생산을 통하여 역사를 진보시킨다고 하는 마르크스(K. Marx)의 명제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마르크스가 살아있을 때에 벌써 인간에게도 "권태를 피울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이도 있다. 이제 문명은 단 한순간이라도 여가가 없으면 입에 가시가 돋고, 대중폭동이 일어날 만큼 변한 것이다.

 이번 여름에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애써 갈구하던 이 여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었는지를. 여가사회학자인 로버쯔(K. Roberts)는 여가의 기능을 인간의 완성에 두고 있다. 즉 인간은 여가를 통해서 비로소 그의 본성의 모든 측면을 계발하여 지, 덕, 체가 골고루 완비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가가, 노동이 그러하듯이, 인간을 계발하기는커녕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여가만이 인간의 자기완성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얼굴 안색과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직장인의 어깨를 보면 현대인의 여가는 제대로 가는 것 같지 않다. 한마디로 여가가 여가답지 않은 것이다. 노동에 지친 현대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현대인의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구매하지 않으면 질 높은 여가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현실은 참으로 문제가 많은 것이다.

 여가의 개념이 삶의, 사회구조의 모든 곳으로 파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지금이라도 올바른 여가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바쁜 나머지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에게 여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과 여가가 일상적인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는 이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세련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과 여가, 소비와 창작, 쓸모와 쓸모없음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질 좋은 신문명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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