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5. 물밑에 가라앉은 추억(하)

▲ 대곡천 일대에서 출토된 백자 - 대곡댐 편입부지의 대곡천은 요즘 말로 하면 거대한 산업단지였다. 고대의 토기가마·기와가마에서부터 조선시대 기와가마·분청사기가마·백자가마·옹기가마·숯가마·제련로 등이 발굴됐다. 대곡천 골짜기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제조된 이른바 ‘산업단지’였다는 것은 이 대곡천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웅변한다.

청동기부터 주거지 형성
삼정리 청동기 주거지 14동 확인
하삼정 고분군 발굴 주거지만 7동
많은 사람 거주, 각종 산업 발달 방증

도자기·기와 가마터 발굴
토기·기와가마부터 백자·숯가마까지
청동기~조선시대 다양한 물건 제조
단순한 하천 이상의 ‘산업단지’ 의미

철 생산 중공업단지 역할도
원료·연료·운반로 갖춘 제철 요충지로
천전리 방리 야철지 가운데 제1호는
18세기부터 장기조업 이뤄졌던 용광로

대곡댐 물 밑으로 가라앉은 하삼정리에는 수많은 조상들이 살았다. 청동기시대, 신라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대한민국 울산 울주군 두서면 그 땅은 집이 허물어지고 그 위로 또 집이 들어서고 하다가 마침내 지난 2004년 11월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땅에서 놀았던 아이들의 흔적은 집터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가 발굴팀에 의해 그 옛날 본연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집터는 사람이 살았던 체온과 지문, 동선. 가정생활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이들이 잠자던 공간, 부부가 생활하던 공간, 가축들이 잠을 자던 공간들은 시대별로 모습만 달리했을 뿐 아직도 물 밑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그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재잘거림은 물 밑에서도 메아리로 남아 귓전을 맴돈다.

▲ 숯

대곡댐 물밑에 가라앉은 삼정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14동이 확인됐다. 이 중 하삼정 고분군에서 발굴된 주거지는 7동. 이들은 대곡천 가까운 낮은 야산에 열집 안팎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 주위에는 경계와 방어를 위해 도랑을 파놓거나 나무울타리(목책)을 쳤다.

대곡박물관에 의하면 이들은 대곡천을 따라 내려와 천전리 각석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각석에 그림을 그린 주인공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청동기시대가 지나가면서 이 마을은 신라의 땅이 되었다. 마을은 대곡천을 따라 길게 또는 지점별로 이어졌다. 대곡댐 물 밑으로 가라앉은 대곡천 일원에는 두동면 구미리 양수정 마을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3동, 두동면 삼정리 하삼정 마을에서 1동, 두동면 천전리 방리마을에서 9동이 발굴됐다.

▲ 기와

초석(礎石), 적심(積心:초석 밑에 돌 등을 넣고 지반을 강하게 하는 건축기법), 담장터, 배수로, 석렬(石列: 돌로 만든 경계), 축대, 수혈유구(竪穴遺構: 지면에서 곧게 내리 판 굴 형태의 건축 잔존물) 등이 확인됐다.

이 건축물들은 통일신라시대의 암키와, 수키와, 연화문수막새 등과 함께 출토됐다. 대곡천을 따라 지어진 이 건물들은 대부분 공용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난 19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반구대 암각화 주변에서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 건축시설 터를 확인했다. 대곡댐 편입부지에서 발굴된 석렬과 똑같은 석렬과 집석유구(集石遺構: 돌무더기 흔적)가 발견된 것. 모래언덕 위에 지반을 단단히 하기 위해 점토와 목탄, 굵은 모래 등을 섞어 다진 석렬은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만든 기초시설로 추정된다.

▲ 지난 2004년 11월 대곡댐 담수가 시작됐다. 유적을 찾아 산행을 하는 울산지역 산행팀 ‘산유회’는 담수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 2004년 2월 대곡천 상류부터 하류까지 걸어서 도자기, 철, 기와 생산지를 답사했다.

이 석렬이 대곡천과 평행하게 따라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위쪽의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담장이나 옹벽 등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반구대 암각화 전망대 인근에는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 건축물 터에서 많은 기와와 돌무더기가 나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위치로 보았을 때 반구대 암각화와 대곡천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누각 형태의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할 뿐 아니라 각종 물건들도 많이 제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방리 야철 제련소

대곡댐 편입부지의 대곡천은 요즘 말로 하면 거대한 산업단지였다. 고대의 토기가마·기와가마에서부터 조선시대 기와가마·분청사기가마·백자가마·옹기가마·숯가마·제련로 등이 발굴됐다. 대곡천 골짜기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제조된 이른바 ‘산업단지’였다는 것은 이 대곡천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웅변한다.

▲ 기와가마

왕족이 친히 이 대곡천까지 왕림해 천전리 각석에 사연을 남긴 것도 그렇고, 신석기시대 고인대인들이 반구대 암각화를 남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곡댐 물 밑의 방리마을에서는 토기가마 3기가, 천전리 고지평 마을에서는 조선 전기 분청사기 가마가, 상삼정 마을과 방리 마을에서는 17~18세기 대의 백자가마 5기가, 방리 마을에서는 18~19세기의 대의 옹기가마가 각각 조사됐다. 대곡박물관은 지난 2014년 9월30일부터 11월30일까지 대곡천 유역과 울산지역의 도자기 생산 역사를 주목한 특별전 ‘울산, 청자·분청사기 그리고 백자를 굽다’를 개최한 바 있다. 이처럼 대곡천은 그냥 멱감고 빨래하던 하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분청사기가마

대곡천은 도자기를 만드는 공장단지였을 뿐 아니라 철을 생산한 중공업단지였다. 쇠부리, 야철, 제련 등으로 불리는 제철은 전후방 산업이 골고루 발달돼야 가능한 산업이다.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가 되는 철광석, 연료로 사용하는 숯(목탄), 철을 운반할 길이 두루 갖춰져 있어야 했다. 대곡댐에 수몰된 두동면 천전리와 방리, 두동면 삼정리·구미리에서는 야철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이 야철지의 철 성분을 분석한 결과 달천광산에서 채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천전리의 방리 야철지 가운데 제1호는 18세기 무렵에 2차에 걸쳐 수리하면서 장기 조업을 했던 용광로로 드러났다.

대곡천은 도자기, 철 등에 이어 기와를 생산했던 곳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기와는 점토를 재료로 제작틀을 사용해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어서 제작한다. 대곡댐 수몰지에서는 두동면 천전리 방리 마을에서 통일신라 기와가마 3기가 발굴됐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천전리에서 기와가마 10기와 미완성 기와가마 2기, 방리 마을에서 기와가마 1기, 구미리 양수정 마을에서 기와가마 1기가 출토됐다. 대곡댐 인근의 장천사지 등의 절터에서는 천전리 기와가마와 동일한 기와가 발견됐다.

대곡댐 물 밑으로 가라앉은 대곡천은 단순한 마을이 아니었다. 청동기시대 때부터 조선시대를 지나 지난 2004년 11월 마을이 물속으로 가라 앉던 그날까지 마을 아이들은 그냥 멱감고 빨래하던 아이들이 아니라 철을 생산하고 도자기를 굽고, 기와를 만든 산업단지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사진 출처=대곡박물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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