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윤문영

◆등 장 인 물
여 자 (20대)
남 자 (50대)

◆장 소
깊은 밤, 인적 끊긴 야산.

◆무 대
무대 중앙에 구덩이가 파헤쳐 있다. 실제 구덩이를 구현하기 어려울 경우, 무대를 2단으로 만들어 아랫단을 구덩이로 대체한다.

암전 상태에서 땅을 파는 소리, 거친 숨소리. 무대 밝아지면, 우비를 입은 남자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고, 손을 묶인 여자가 구덩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 남자, 삽질을 멈추고 커다란 페트병의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남 자 : (여자에게 페트병을 내민다)

여 자 : (고개를 젓는다)

남 자 : (다시 물을 마신다) 어떻게? 더 팔까?

여 자 : (고개를 젓는다)

남 자 : (여자의 몸과 구덩이 깊이를 겨누며) 너무 얕을 것 같은데? 이럼 금방 발견될 거야. 더 팔까?

여 자 : (고개를 젓는다)

남 자 : 싫다는 거야, 상관없다는 거야?

여 자 : (남자를 바라본다)

남 자 : (여자를 바라보다가 외면하고) 아무리 인적이 끊긴 곳이라도 너무 얕아. 너도 금방 발견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이렇게 묻어버리면 산짐승이 파헤칠 수도 있어. 그럼 보기 흉하잖아. (다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 그러다가 삽을 던져 버리고 여자 옆에 주저앉는다.

남 자 :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 (하늘을 바라보며) 괜히 서둘렀네. 비가 오기 전에 끝내려고 했는데, 도대체 언제 내린다는 거야?

남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남 자 : (불을 붙이려다 여자를 바라보더니) 하나 줘?

여 자 : (고개를 끄덕인다)

남 자 : (담배를 꺼내다가) 뭐야? 돗대잖아? (고민하며) 아, 진짜…

남자, 담뱃갑을 통째로 여자에게 건넨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지만 라이터가 좀처럼 켜지지 않는다. 그사이 품에서 쪽지를 꺼내 남자 몰래 담뱃갑에 넣는 여자. 라이터를 던져버린 남자는 담뱃갑을 뺏어 주머니에 다시 넣는다.

여 자 : (담뱃갑을 유심히 쳐다본다)

남 자 : 무섭게 쳐다보네. 절대 고의는 아니야. 내가 원래 결정적인 순간에 재수가 좀 없거든. 어쨌든 담배는 미안하게 됐어.

여 자 : (비웃는다)

남 자 : 라이터가 고장난 걸 나보고 어쩌라고? 미안하다고 했잖아?

여 자 : 사람 죽이는 건 하나도 안 미안하면서, 담배는 미안한가 보네?

남 자 : 왜? 그게 이상한가?

여 자 : 뻔뻔해서 다행이야. 당신이 후회할까 걱정했거든.

남 자 : 후회? 그런 감정은 사치 아닌가? 난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뭘 사갈까, 그것만 생각했거든.

여 자 : 그 마음 변하지 않길 바랄게. 당신은 절대 미안하지 않아야 해.

남자, 삽을 들어 구덩이 이곳저곳을 툭툭 친다.

남 자 : 골라.

여 자 : 뭘?

남 자 : 그냥 산 채로 묻힐지, 숨통이 끊기고 묻힐지.

여 자 : 어떤 게 더 고통스러운데?

남 자 :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안 고르면 내 마음대로 한다? (삽을 허공에 몇 번 휘두른다)

여 자 : 사람 죽이는 거, 무섭지 않은가 봐?

남 자 : 죽는 건 넌데, 내가 무서울 리가.

여 자 : 살아 있는 게 더 무서울 때도 있을 텐데?

남 자 : 갑자기 말이 많아졌어. 이제 와서 죽기 싫다는 뜻인가?

남자, 여자의 뒤로 다가가 삽을 높이 치켜든다. 그리고 힘차게 내리치려다가 멈춘다.

남 자 : 안 놀라네?

여 자 : 내가 그래야 해?

남 자 : 신기하군. 정말 죽는 게 무섭지 않아?

여 자 : 말했잖아. 살아있는 게 더 무서울 때가 있다고.

남 자 : (여자의 옆에 앉으며) 도대체 그게 언젠데? 어떤 상황이 돼서야 사는 게 더 무서워지는데?

여 자 : 당신도 이미 알고 있잖아?

남 자 : 뭐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뭘 알고 있다는 거야?

여 자 : 사는 게 무서워서 차라리 죽어버릴까? 당신도 그런 생각 했었잖아?

남 자 : (여자의 멱살을 잡으며)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데?

여 자 : (남자를 빤히 바라본다) 당신의 진짜 얼굴.

남자, 더욱 세게 여자의 멱살을 쥐다가 스르르 풀어준다.

남 자 : 인정해야겠어. 궁금하게 만드는 그 재주.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좋아, 내가 물어봐 줄게.

여 자 : (무릎 꿇은 자세에서 편한 자세로 바꾼다)

남 자 : 긴 얘기인가 보네? (여자 앞에 앉는다) 이유가 뭐야? 널 죽여 달라는 이유.

여 자 :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죽고 싶으니까.

남 자 : 그러니까 왜 죽고 싶은 거냐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고 싶으며, 자길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건데?

여 자 : 죄를 지었으니까.

남 자 : 죄? 그걸 지금 믿으란 말이야? (비웃으며) 엄청난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는 표정이더니 고작 죄 때문이라고?

여 자 : 죄를 지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

남 자 : 어떤 죄를 죽음으로 치러야 하는데? 사람이라도 죽였나?

여 자 : …

남 자 : 왜 말이 없어? 정말 죽였어? 너 같이 생긴 애가 사람을 죽였을 리 없잖아?

여 자 : 죽였어.

남 자 : 누굴?

여 자 : 많이.

남 자 : (벌떡 일어나며) 너 연쇄살인범이야? 싸이코패스 그런 거야? 거짓말이지? 지금 겁주려고 그러는 거지? (슬그머니 삽을 움켜쥔다)

여 자 : (묶인 손을 보여주며) 겁먹을 거 없잖아?

남 자 : 내가 왜 겁을 내? 그런 황당한 말을 믿을 것 같아? (불안한 모습으로 서성이다가) 어떻게 죽였는데? 칼로 찔렀어? 목을 막 졸랐니? (생각하다가) 힘으로 죽이진 않았을 거야. 그럼 약 탔니? 차로 치었나? 아니면 청부살인?

여 자 : (남자를 바라보다가) 기도.

남 자 : 뭐, 뭐라고?

여 자 : 기도로 죽였어.

남 자 : (멍한 표정을 짓다가 크게 웃는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죽여 달라고 할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그 말을 믿으라고? 기도?

여 자 : 당신은 기도한 적 없었나? 그 기도가 이루어진 적 단 한 번도 없었나?

남 자 : (여전히 웃으며) 그래서 누굴 죽였는데?

여 자 :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 자 : 처음은 있었을 거 아냐? (웃음기를 거두며) 그래서 처음이 누구냐고?

여 자 : 그 여자. 나를 낳은, 그 여자.

남 자 : 뭐, 엄마? 진짜 엄마를 죽였다고? 왜?

여 자 : 날 버렸거든.

남 자 : (충격 받은 표정) 버렸다고 엄마를 죽여?

여 자 : 부족한가? 죽을만한 이유로?

남 자 : 당연히 부족하지, 아니 말이 안 되지. 어떻게 버렸다고 사람을 죽여?

여 자 :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네?

남 자 : (당황하며) 사정이 있었겠지. 버릴 땐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거야.

여 자 : 어떤 사정이 있으면 사람이 사람을 버려도 되는 건데?

남 자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여 자 :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여자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버려졌을 때
난 간절히 기도했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그 여자, 정말 죽어 버렸어.

남 자 :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절대 모르는 일이야.

여 자 : 그 여자, 밥솥 가득 밥을 해 놓고 나가면 일주일, 열흘이 지나야 돌아왔어. 일부러 밥이 바닥날 때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고 다시 밥을 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럼 난 무서워졌어. 저 밥이 다 되면 다시 나가겠구나. 또 오랫동안 남겨지겠구나. 할머니와 여섯 살짜리 나는 밥을 아껴 먹으며 그 여자를 기다렸어. 그 여자를 기다리는 내가 너무 끔찍했지만, 그 많던 밥이 줄어드는 건 더 무서웠어. (사이) 그러다 더 이상 밥을 하는 것도 지겨워졌는지 그 여자, 보육원에 날 버렸어.

남 자 : 방치하는 것보다 잘된 일일지도 모르잖아?

여 자 : (남자를 노려보며) 그럼 할머니도 같이 버렸어야지. 나랑 같이 보냈어야지!

남 자 : (멍한 표정)

여 자 : 보육원에서 도망쳤어. 걷고 또 걸어 며칠 만에 집에 찾아왔는데. 할머니, 할머니가… (사이) 쓰러져 있었어. 밥이 가득 차 있는 밥솥 앞에서.

남 자 : 서, 설마?

여 자 :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거든.

남 자 : 뭐라고?

여 자 : 움직이진 못해도 사람이 배는 고픈 거잖아. 할머니는 밥솥까지 기어갔어. 팔꿈치에 멍이 들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나도록. 겨우 거기까지 기어서 갔는데, 밥솥은 탁자 위에 있었어. 그 여자, 습관처럼 밥솥을 높이 올려둔 거야. 할머니는 혼자서 일어날 수 없었는데 말이야.

남 자 : 아니지? 그때 네가 일으켜서 밥을 먹였지? 그런 거지?

여 자 : 할머니 눈에선,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었어.

남자, 충격을 받아 비틀거리다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

남 자 :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서 죽였니?

여 자 : 죽이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남 자 : 그래, 인정해.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하지만 겨우 여섯 살이었다면서? 그 어린애가 엄마를 어떻게 죽였냐고?

여 자 : 다시 그 여자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버려졌을 때 난 간절히 기도했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 여자 눈에도 구더기가 꿈틀거렸으면 좋겠다고. (사이) 그랬더니 그 여자, 정말 죽어 버렸어.

남 자 : 그게 기도 때문이라고?

여 자 : 응답 받았던 거야.

남 자 : 그건 우연이야. 그냥 어쩌다 벌어진 일이라고.

여 자 :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어도 그 여자, 죽었을까?

남 자 : 죽었을 거야. 끔찍한 죄를 지었으니까.

여 자 : 그래서 죽고 싶은 거야. 나도 죄를 지었으니까.

남 자 : 버림받은 너는, 아무 죄가 없어.

여 자 : 더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도?

남 자 : 많은 사람? 몇 명이나?

여 자 : 서른? 서른다섯이었나?

남 자 : (깜짝 놀란다) 아니지? 그냥 해보는 말이지?

여 자 : 몇 년 동안 기도를 하지 않았어. 무서웠으니까. 나 때문에 누군가 죽는 건 그 여자가 마지막이었으면 했으니까. (사이) 보육원엔 나보다 두 살 어린 아이가 있었어. 또래보다 키도 작고 빼빼 마른. 그런데 언제부터 혼자 무언가를 몰래 먹는 눈치였어. 화가 났어. 나도 배고픈데, 모두 배고픈데 치사하게 혼자 먹는구나. 막 미워지더라고. 그래서 같이 먹자고 소리 질렀어. 나도 배고프다고.

남 자 :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여 자 : 언니, 나도 배고파. 거짓말. 정말이야. 그런데 왜 자꾸 배가 나와. 우리 모두 배가 고픈데, 넌 왜 배가 불러오는데?

남 자 : (화난 표정으로) 몇 살이었는데? 그 아이 몇 살이었냐고!

여 자 : 어느 날, 원장이 그 아이 손을 잡고 어딜 다녀왔더라고. 그리고 거짓말같이 그 아이 배가 홀쭉하게 변해 있었어. 배고픈 내 배처럼. 그 아이가 미안한 얼굴로 그러더라. 원장님이 햄버거 사줬다. 그런데 너무 맛있어서 남겨오지 못했다고.

남 자 : 이런 미친.

여 자 : 그런데 다 알고 있었어. 나만 모르고 모두 다. 원장이 햄버거 사 준 아이가 더 많다는 것도 모두 다. (일어나며) 그래서 기도했어. 아주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어. 다 죽여주세요. 괴물 같은 원장을 죽여주시고, 알고 있던 사람들 모조리 죽여주세요. 모른 척했던 인간들, 알면서 눈 감았던 그 모든 개자식들! (눈을 감고) 죽여주시옵소서!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주시옵소서! 한 놈도 빼지 않고 지옥불로 모두 태워 죽여주시옵소서!

남 자 : 왜 이래? 정신 차려! (여자의 어깨를 잡는다)

그때, 번개와 요란한 천둥소리. 깜짝 놀라 여자를 밀어내고 주저앉는 남자. 하늘을 보며 울먹이던 여자가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여 자 : 그날, 보육원에 불이 났어.

남 자 : 네가 그랬어? 그 불, 네가 지른 거냐고?

여 자 : 기도했을 뿐이야.

남 자 : 거짓말 마! 네가 그런 거잖아? 화가 나서 불 지른 거잖아!

여 자 : 당신도 이제 알잖아? 기도에 응답받았다는 걸.

남 자 : (두려운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다가) 젠장, 믿을 뻔했잖아. (일어나 페트병의 물을 모두 마신다) 내가 그렇게 순진해 보여?

여 자 : 내가 죽고 나면 당신도 믿게 될 거야. 그때 당신의 표정을 못 보는 건 조금 아쉽네.

남 자 : (하늘을 보고) 비 쏟아지기 전에 빨리 끝내자. 어떻게 끝내줄까?

여 자 : 최대한 고통스럽게. (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린다)

남자, 삽으로 흙을 퍼 여자의 몸 위에 뿌린다. 구덩이는 점점 흙으로 차올라 여자의 허리까지 묻힌다.

남 자 : (삽을 멈추며) 너 정말 독하구나? 이만하면 충분한 거 아냐? 정말 죽으려는 건 아니잖아?

여 자 :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남 자 : 고해성사라도 하는 건가?

여 자 : 용서 받으려는 거야.

남 자 : 틀렸어. 넌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여 자 : 모두 내가 죽인 거야.

남 자 : 진짜 기도 때문이라고? 우연일 뿐이야. 아니, 정말 네 기도 때문이라고 해도, 그 사람들이 잘못 한 거잖아? 용서를 빌어야 하는 건 그 사람들이라고. 그 상황이라면 누구도 참아선 안 되는 거야. 나라도 모두 죽어버리라고 저주했을 거라고.

여 자 : 잘못이 아니라고? 그들이 죄인이라서?

남 자 : 그래, 그러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여 자 : 죄 없는 사람이 죽었다면? 내 기도로 죄 없는 사람까지 죽게 만들었다면?

남 자 : 억지 부리지 마. 넌 그냥 죽을 핑계를 찾고 있을 뿐이라고!

여 자 :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되돌릴 수 있다면, 바꿀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남 자 : 죄책감에 이번엔 후회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여 자 : 나를 아껴준 사람이 있었어. 그냥 이유 없이 웃어주고, 그냥 말없이 옆에 서 있던 사람. 내가 겪었던 일을 다 듣고도, 따뜻하게 손잡아주던 사람. 기도로 저질렀던 끔찍한 일들을 다 알면서도, 눈물로 위로해주던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있겠다. 세상을 원망하고 내 자신을 미워했던 모든 걸 잊어버리고, 나도 사랑받을 수 있겠다.

남 자 : 그런 사람을 왜? 그냥 잘 살았어야지, 행복했어야지?

여 자 : 내 마음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날, 그 사람이 병원으로 나를 데려갔어. 거기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자가 누워 있었어. 그 사람의 아내가.

남 자 : (어이없는 웃음) 그놈이 널 속였어? 넌 그것도 모르고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그래서 기도했니? 널 갖고 논 그놈을 죽여 달라고?

여 자 : 차라리 그럴걸 그랬어.

남 자 : 뭐라고? (생각하다가) 설마 그 여자? 그딴 놈과 행복해지려고 불쌍한 그 여자를?

여 자 : 그 사람이 눈만 뜨고 있는 아내 앞에서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 결혼하자고도 속삭였어. (사이) 그래서 기도해 달라고. 아내가 빨리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남 자 : (무릎 꿇고 여자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아내를 죽여 달라고? 안 했지? 안 했잖아? 그런 기도는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남자,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친다. 몇 번의 주먹질을 멈추고 천천히 일어난다.

남 자 : 다 거짓말이지? 내가 널 죽이지 못할까봐 지어낸 말이지? 넌 그냥 사는 게 지겨워진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스스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꾸며대고 있는 거잖아. 살인자? 죗값을 치러? 넌 그저 죽고 싶어서 날 이용하는 중이잖아!

남자, 삽을 들어 여자의 몸 위로 흙을 뿌린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흙을 뿌리던 남자가 갑자기 멈춘다.

남 자 : 하나만 더 묻자. 왜 하필 나였니? 그냥 널 죽여 달라고 기도하지 왜 나였냐고? 왜 이렇게 힘들게 죽고 싶었던 건데?

여 자 : 더 이상 죽여 달라는 기도는 안 하기로 했으니까.

남 자 : 그러니까 왜 나냐고? 날 고른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여 자 : 기도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이번엔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 기도로 반드시 사람을 살려야겠다. 그때 당신을 알게 됐어. 저 사람, 내가 살린다.

남 자 : 나를 살리겠다고?

여 자 : 번개탄을 들고 자동차에 타는 당신을 봤어.

남 자 : (삽을 떨어뜨린다)

여 자 : 당신은 울고 있었어. 가족사진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고. 그래서 기도했어. 살려달라고. 저 사람은 죽으면 절대 안 된다고. 나를 위해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고.

남 자 : (떨리는 목소리로) 정말 나를 봤어?

여 자 : 내 기도가 끝나자 당신은 차에서 내려 번개탄을 던져버렸어. 그리고 전화를 하더라? 애들은 자? 필요한 거 없어?

남 자 :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다)

여 자 : 당신은 살아야 했어. 당신은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갈 돈이 없는 사람일 뿐이었으니까.

남 자 : (고개를 들고) 그래서 나를 살렸다고? 내가 지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죽어가는 날 살려주고, 이렇게 먹고 살 돈도 줬으니까?

여 자 : 당신은 돈이 필요했고, 나는 묻어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야.

남자, 삽을 들어 흙을 뿌리기 시작한다.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비의 모자를 쓰고 여자를 외면한 채 서둘러 흙을 뿌리는 남자.어느새 여자의 목까지 흙이 차오른다.

▲ 일러스트=윤문영

남 자 : 이제 숨 쉬기 어려워질 거야.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여기서 멈출 수 있어.

여 자 : 당신, 참 한심한 사람이구나.

남 자 : 뭐라고?

여 자 : 번개탄에 불을 붙이지 못할 때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도 망설이고 있잖아. 한심하게 말이야.

남 자 : 정말 죽고 싶어? 내가 못 할 거 같아? (삽을 들어 흙을 뿌리려 하다가 허공에서 멈춘다)

여 자 : 당신은 한심한데다가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이야. 원래 다른 사람 앞에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겁쟁이잖아.

남 자 : 정말 죽여 버린다?

여 자 : 무서워서 그러잖아? 두려워서 그러는 거잖아? 아닌 척 하려고 그렇게 나쁜 인간인 척 내게 말했던 거잖아?

남 자 : 그만해.

여 자 : 한 번도 그렇게 눈을 뜨고, 한 번도 그렇게 무서운 목소리로 말한 적 없었잖아? 정말 사람을 죽이게 될까봐 떨고 있는 거잖아?

남 자 : 내가 지금 무서워하는 것 같아?

여 자 : 당신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잖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욕심내지 않고. 가족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잖아? 그런데 왜 그랬을까? 당신에게 왜 그런 불행이 찾아 왔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잘못한 일은 기억나지 않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든 걸까? 돈이 필요하다. 가족을 먹여 살릴 돈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텐데. 돈만 준다면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남 자 : 그만!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데?

여 자 : 돈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왔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날 죽일 마음은 없었어. 그냥 적당히 겁만 주고 끝내고 싶었을 거야. 그래도 괜찮겠지. 설마 진짜 죽여달라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이 당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거라고.

남 자 : 함부로 말하지 마! 진짜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여 자 : (비웃으며)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움이 있었겠지. 혹시 마음이 변해 살려달라고 하면 어쩌나? 그럼 돈을 돌려줘야 하는 걸까? 돌려 달라면 정말 죽여야 하나?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당신은 불쌍한 패배자야.

남자, 여자 얼굴 위로 흙을 뿌리려다 허공으로 날려버린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한다.

그 사람이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없는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가기를,
숨 쉬는 게 지옥처럼 느껴지기를.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를 처음 버린 사람이니까요.

남 자 : (지금까지와는 다른 풀이 죽은 말투로) 날 이렇게까지 자극하면서 죽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여 자 : 진짜 당신으로 돌아왔네?

남 자 : 그래요. 당신 말처럼 무서웠어요. 아무리 돈 때문이라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정말 죽고 싶어 하는군요.

여 자 : 알았으면 이젠 죽여줘.

남 자 : 아직 남아 있는 거죠? 진짜 죽고 싶은 이유. 아직 말하지 않은 뭔가가 남았잖아요? 말해요. 들어야겠어요.

여 자 : 싫어.

남 자 : 듣기 전엔 난 아무 짓도 안 할 겁니다.

여 자 : 후회할 거야.

남 자 : 걱정 말아요. 후회는 벌써 하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 자 : (한참 생각하다가) 어떤 사람을 위한 내 마지막 기도, 그게 후회돼.

남 자 : 이젠 살려달라는 기도만 한다면서요? 그런데 무슨 후회를 한다는 겁니까?

여 자 : 살려달라고 기도했어. 그 사람 영원히 죽지 않고 살려달라고.

남 자 : 그게 왜 마음에 걸리는 거죠?

여 자 : 너무 끔찍한 기도였어. 그래서 난 지금 꼭 죽어야겠어. 내가 너무 무서워졌거든.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그 사람을 위해 무서운 기도를 더 하게 될지 두려워.

남 자 : 살려달라는 기도가 왜 끔찍한 거냐고요?

여 자 : 그 사람,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 그런데 웃기지? 그렇게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 날 모른 척 했어. 내 존재마저 까맣게 잊고 가족을 위해 살고 있어. 나도 그 사람의 가족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야.

남 자 : 누가 또 당신을 버린 겁니까?

여 자 : 그래서 그 사람, 영원히 살아있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어. 살아서, 영원히 살아서, 끔찍한 고통 받게 해달라고. 사는 게 지옥처럼 만들어 달라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만들어 달라고.

남 자 : 뭐, 뭐라고요?

여 자 : (무서운 목소리로) 그래서 죽지 못함을 후회하도록, 나를 버린 그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도록. 그 사람이 끔찍이 여기는 가족을 볼 때마다 내 얼굴을 떠올리며 지옥 속에서 살아가도록.

남 자 : 누굽니까? 그렇게 미워하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요?

여 자 : (미친 듯이 웃다가 노래를 부른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여자, 허밍으로 노래를 계속 하다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한다.

남 자 :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당신은, 넌, 괴물이야.

남자, 여자의 얼굴 위로 미친 듯이 흙을 뿌린다. 여자의 휘파람 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멈춘다. 번개와 천둥. 암전.

무대 밝아지면, 구덩이는 모두 메워지고 그 위에 남자 혼자 서 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남자. 아까 던져버렸던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이려 하지만 여전히 고장 난 상태. 담배를 담뱃갑에 넣으려다 그 속에서 쪽지를 발견한다. 쪽지를 꺼내 휴대폰 불빛으로 비추는 남자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그러다 갑자기 삽으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남 자 : 안 돼! 제발 안 돼! 안 된다고!

남자, 미친 듯이 절규하더니 삽을 내던지고 손으로 구덩이를 판다. 암전.

무대 밝아지면, 남자가 구덩이 속에서 여자를 안고 오열하고 있다. ‘즐거운 나의 집’ 첼로 연주곡이 흐른다. 음산하면서도 무거운 첼로 소리 점점 고조되다가 조금 작아진다.

여 자 : (소리) 정말 내 기도로 그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연이었을까, 아님 정말로 그들을 죽인 것이었을까? 하지만 모두 내 잘못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음으로 용서를 빕니다. (사이) 마지막으로 죄를 하나 더 짓겠습니다. 이 기도만은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이) 그 사람이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없는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가기를, 숨 쉬는 게 지옥처럼 느껴지기를.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를 처음 버린 사람이니까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날 버린 사람. 그리고 내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 (사이) 할머니도, 나를 버린 엄마도, 불에 타버린 보육원 사람들도, 죄 없는 그 남자의 아내도… 그들이 죽은 것은 모두 그 사람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날 버리지 않았다면, 내 기도는 시작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사이) 마지막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당신이 이 편지를 읽었다면 내 기도는 이미 응답받았습니다. (사이) 나를 처음 버린 사람, 나를 산 채로 묻은 사람,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 사람, 그 사람, 당신, 내 아버지께.

번개와 천둥. 남자의 오열 점점 커지고, 음악도 고조된다. 암전. <끝>

▲ 김환일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자

[당선소감]김환일 / “꿈을 찾아 더 치열하게 고민해 좋은 글 쓸 것”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의 입시 명문학교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2학년 때인가, 가정환경조사를 하면서 장래희망을 적는 칸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한창 대학로를 누비며 연극관람에 빠져있던 저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연극 연출가’라고 적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따로 호출을 하시더군요. 전교생중에 이런 장래희망을 적은 사람은 너 하나라면서 한심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고 갑자기 그때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꿈을 꾸던 시절도 있었구나.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생활에 지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왔던, 그리고 너무 나태했던 시간들을 반성했습니다. 한편으론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꿈을 찾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안도감도 들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좋은 기회를 얻은 만큼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좋은 글을 써야 겠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긴 하루였습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문학의 끈을 놓지 않도록 저를 격려해준 영하형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항상 절 아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준 아내, 성실이에게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약력
-서울 출생
-명지대 문창과 졸업, 동대학원 수료

▲ 김영무 심사위원

[심사평]김영무 / “탄탄한 극적 구성력·긴장감 있는 대사 돋보여”

시인이나 소설가와 달리 희곡작가는 문학수업과 아울러 반드시 연극적 미학에 대한 탐구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희곡의 대사는 극적 흐름 속의 대화로서 시적 절제미가 그 생명이어서 소설 보다는 오히려 시에 가까운 법인데, 그냥 재치있는 말장난을 대사로 여기려 든 경우가 허다한 것 같았다.

무대 위에 전개될 사건이나 스토리는 객관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의 관념적 유희나 편견 내지 어떤 선입견에 의탁한 넋두리들을 막무가내 식으로 나열하거나 강조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침대 택시>는 감동적인 요소의 결여가 아쉬움으로 남았고 <유토피아>의 경우에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 결점이라고 들 수 있을 것 같다.

당선작 <고해(告解), 고해(苦海)>는 깔끔하고 심플한 2인극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응축되어 있는 중량감이 결코 만만치 않아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복수라는 극적 시추에이션에 살인청부 행위를 무대상의 사건으로 채택한 이 작품은 우선 극적 구성력이 탄탄한데다 팽팽한 긴장감을 끝까지 이끌고 가는 대사의 구사력이 돋보였는가 하면, 아주 능청스럽게도 마지막 대사 한마디에 작가 자신의 시니컬한 사회의식까지 얹어 놓은 수법 등이 무척 탁월하게 느껴졌다.

약력
-극작가, 방송작가, 중앙일보 희곡 등단
-한국희곡문학상, 행원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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