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구대-세상이 시끄럽고 아우성쳐도 자연은 계절마다 제 빛깔로 향기를 내보낸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삶에 지칠 때마다 소슬한 자연풍광은 고단함을 달래주는, 그냥 좋은 길벗이다.(최인수 作 (한지에 수묵담채 74×60㎝)

지난해 가을, 시민문예대학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후에 있을 작가모임도 미뤄진 터라 마음이 한결 느긋했다.

굴화마을 고속도로 굴다리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한 여인이 톡톡 튀는 서울 말씨로 이곳 너머도 나무가 있냐고 물었다. 초면인데 느닷없이 묻는 어투가 격 없이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여인과 맞닥뜨린 곳은 고속도로 근처 근린시설지역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지역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굴다리를 지나면 번화가라고 말하자 여인은 다짜고짜 숲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다. 운동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신이 서 있는 지역도 모르면서 뭔 운동을 한다는 걸까. 운동이라면 태화강변이 좋을 것이라며 가리키자 자신은 숲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짧은 시간, 여인을 훑었다. 나이는 40대 후반쯤으로 보이고 눈빛은 숙제하다가 잠시 놓여난 듯했다. 간편한 신발과 나이대보다 젊은 옷차림이야 운동을 한다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귀걸이와 반지와 팔찌는 운동할 사람답지 않아 보였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천사의 무리에서 한 명 뚝 떨어져 나와 이곳 지리를 아무 것도 몰라 당황하고 있는 듯한 참신함도 느껴졌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주의하라고 당부한 가족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이 갔다.

무슨 일을 하냐는 물음에 의사라고 했다. 지금까지 이런 차림새를 한 의사는 보지 못했다. 의사라면 낮 시간에 일을 해야지 이런 데를…. 당신이 의사라면 난 박사네 할 정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의심하는 눈빛을 의식했는지, 전국 순회 중 오늘 울산에 와 동료는 일하고 그들이 마치는 시각까지 자신은 운동 나왔다고 했다. 가정의학과 의사라며 신분증을 보여줘요? 라며 웃었다. 쾌활한 성격과 발랄한 모습이 내 의식 속에 있는 의사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쓴다고 말했다.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가까이 있는 내 서실에 와, 차를 마시며 책꽂이에 꽂힌 책들에 관심을 가졌다. 열하일기는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니 서로 이야기가 길어졌다. 나이는 50대 초반, 내 동생뻘이었다. 사람과 관계를 무디게 맺고 싶던 마음이 변덕을 부렸다. 바쁘게 사느라 나 역시 너무 오랜 기간 숲과 멀어져 있었다. 한 시간가량만 함께 걸을 요량으로 문수산으로 갔다.

문수산 초입에 들자 여인은 처음 만날 때보다 수다스러웠다. 핸드폰을 꺼내 산 풍경을 배경으로 해설과 함께 동영상을 찍고 내게 자신의 모습을 사진 찍어달라고 했다. 순간을 문화로 남기는 그녀의 모습에 사뭇 놀랐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는, 호호호 웃으며 나는 사진은 아니라며 글이나 쓰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의사는 무슨, 수다쟁이 아줌마 같았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한 곳만 더 구경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서울깍쟁이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으니 조금만 더 함께 있어 주기로 했다. 산에서 내려온 곳에서 볼만한 장소로 아끼는 길을 생각해냈다.

나무가 있어 계절마다 아름답게 변하는 그 길을 난 가끔 혼자 걸어가 보곤 한다. 숲 속으로 난 S자 길을 따라 올라갔다. 길 끝에는 집이 있고 평소에는 철망 대문이 닫혀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열려 있었다. 우리를 들어와 보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대문 앞을 조망하는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으며 두 손을 흔들고 인사했다. 그녀 덕분에 그 집 마당에 들어가 보았다.

이제 헤어져야지 생각하는데, 그녀는 울산에서 가장 자신 있게 안내해 줄 수 있는 곳을 물었다. 갑자기 10여 년 전 일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오신 시인 몇 분과 함께 차를 타게 된 적이 있었다. 난 울산에 관해 묻는 질문에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1983년부터 울산에 살고 있으면서 울산에 대한 문외한이었다. 마음속 깊이 부끄러웠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난 어느 누가 오더라도 울산의 한 부분만이라도 바르게 설명해 주려고 나름대로 준비해 두었다.

진작 그 질문을 했더라면, 시계를 보았다. 해가 지려면 세 시간가량 남았었다. 인연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데, 신이 잠시 그녀를 위해 나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인에게 그곳을 안내해주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환해졌다. 그런데 가족이 당부한 말이 발목을 잡았다. 낯선 여인과 차까지 타고? 가족이 알면 걱정할 것인데, 그냥 몰래 가? 마음 속 갈등을 가르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 그녀를 싣고 대곡으로 달렸다.

대곡은 융기와 침식으로 생겨난 감입곡류 속 풍경이 아름답다. 그곳을 걸으며 그녀는 감탄했다. 천전리각석과 집청정 앞 계곡, 반구대암각화에 대해 내가 아는 만큼 설명했다.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사진을 찍던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에 공간이 찼다며 내 폰으로 자신을 찍어 달라 했다. 그리고는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해질 무렵,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천사를 만났다는. 천사는 내 맘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낯선 사람과 있는 동안 나는 두려웠다. 서울 오면 꼭 연락하라던 그녀, 지금 와서 생각하니 먼 곳에 친구 한 명을 두게 된 것 같다.

▲ 김미영씨

■ 김미영씨는
·경남 사천시 서포 출생
·울산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문학석사
·울산문인협회 회원, 수필가
·울산정명 600주년 기념 전국문예공모 시부문 대상
·명작스토리텔링연구실에서 작품 활동 중.
 

 

 

 

▲ 최인수씨

■ 최인수씨는
·개인전(서울·대구·울산)
·대한민국현대한국화전, 한국화페스티벌 외 다수
·울산미술대전, 한마음미술대전 초대작가
·울산한국화회 회장, 울산미협 한국화분과위원장
·틈크로키, 배돋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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