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돼지는 원래 ‘돝아지’라고 불렀다. ‘돝(돋)’에 작은 것을 뜻하는 ‘­아지’가 붙어 ‘돝아지’가 된 것. 강(개)아지, 송(소)아지, 망(말)아지 등도 모두 ‘­아지’로 만들어졌다. 싹이 돋아날 가능성이 있으면 ‘싸가지’라고 말하고 싹이 틀 움직임이 없으면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표현한다. 다만 돼지를 뜻하는 ‘돝(돋)’의 유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울산 남구 여천동에는 돼지 머리를 닮은 돋질산(猪頭山)이 있다. 여기서 ‘돋’은 돼지(猪)를, ‘질’은 머리(頭)를 말한다. 시내 쪽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면 돋질산은 염포만을 향해 서 있는 거대한 돼지의 머리 형상이다. 주둥이가 불쑥 튀어나와 영판 멧돼지를 닮았다.

울산은 멧돼지의 천국이었다. 국보 제285호 반구대암각화에는 고래 뿐 아니라 여러 마리 멧돼지 그림이 있는데, 돼지마다 제각각 생김새가 조금씩 다르다. 코가 긴 돼지를 비롯해 몸집이 큰 돼지, 꼬리가 긴 돼지 등···.

특히 양정동 쪽으로 바라보는 돋질산은 어쩌면 지난 7000년의 세월 동안 삼산·성남·옥교동 일원(그 당시에는 바다였음) 태화강으로 들어온 고래들의 포획 장면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염포만은 70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외해(外海)에서 집채만한 고래를 유인해 태화강 상류쪽으로 가둬넣는 입구 역할을 했다.

▲ 반구대 암각화에 있는 멧돼지 그림.

멧돼지는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한다. 1년에 평균 4.5마리의 새끼를 낳고, 새끼들은 2년만 지나면 번식이 가능하다. 조상들이 바위에 살찐 멧돼지를 그린 것은 울산만에서 잡혔던 고래들 처럼 돼지도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면 가장 많이 하는 놀이가 윷놀이다.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상징한다. ‘도’는 원말 ‘돝’에서 나온 것으로 언어학자들은 판단한다. 돌고래의 어원인 ‘돝고래(돼지고래)’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리보면 돼지와 고래는 일면 상통하는 것같기도 하다.

멧돼지는 12월~1월 사이에 새끼를 낳는다. 그러다 보니 암컷들은 하루종일 새끼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양식을 구하러 시내로까지 나온다. 표준서식밀도의 4배에 이르다보니 이 계절은 멧돼지들에게 그야말로 보릿고개나 다름없다.

지난 2007년 불국사 극락전 처마 밑에 길이 50㎝의 황금빛 돼지 조각이 발견됐다. 국보 제287호 금동대향로에도 39마리의 동물 가운데 멧돼지가 있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깨지다 보니 그 옛날 대접 받던 반구대암각화의 황금돼지는 간 곳 없고, 배고픈 애기 돼지들만 도심으로 몰려가고 있다. 황금돼지의 해에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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