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문화사업지원팀 차장

현재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 20세기 중반 혜성처럼 등장해 여성 피아니스트의 상징과도 같았던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꼽자면 지난 20세기부터 클래식을 이끌고 있는 몇 남지 않는 거장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외에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이들의 출신지가 클래식의 중심지인 유럽이 아닌 남미의 아르헨티나라는 점이다.

19세기 전쟁과 내분으로 신음하던 아르헨티나는 정국이 안정되자 근대화 정책으로 이민자를 적극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특히 유럽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에 의해 국가의 정체성이 재정립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멕시코는 아즈텍의 후손이고, 페루는 잉카의 후손이며, 아르헨티나는 배에서 내린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했겠는가. 아르헨티나에선 각국의 이민자들과 원주민들이 자의반 타의반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급작스런 환경변화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여러 문화가 충돌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기 일쑤였고 중재 또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충돌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색다른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갖게 된 것이다.

19세기 아르헨티나로 가보자. 부푼 꿈을 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내린 이민자들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을 것이다. 타국에서의 생활 또한 쉽지 않았다. 낮에는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여가라곤 술집 등지에서 교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페인 출신 이민자들은 고향의 ‘아바네라’를 바탕으로 춤을 추곤 했는데, 이 ‘아바네라’가 현지에 맞춰 변형된 것이 탱고의 기원이다. 탱고의 탄생은 그 어느 나라보다 문화 충돌이 활발했던 아르헨티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렌보임과 아르헤리치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의 등장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19세기부터 등장한 과거와 미래의 아이러니가 공존하는 수많은 건축물부터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탱고를 위시한 예술장르, 또 보르헤스와 같은 걸출한 문학가들까지 아르헨티나의 문화는 그 방향성을 예측하기 힘들만큼 다채로웠다. 이러한 다양성의 보고 속에서 바렌보임과 아르헤리치의 등장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울산은 이주민들이 많은 도시다. 이주민들이 이미 몇 세대를 거쳐 간 다른 도시들과 달리 울산은 여전히 1세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이 있다. 각지에서 몰려든 이주민들이 갖고 있는 넘치는 다양성에 비해 문화적 충돌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문화는 섞여야 제 맛이건만 구성원 간에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느낌이 적다. 아마도 그간의 높은 경제수준 덕분에 갈등의 소지가 적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익은 독점하지만 위기는 공유된다. 현재 울산의 모습이다. 그 동안 상호 교류가 적었던 시민들이 경제위기로 인해 서로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이다. 어쩌면 울산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가치는 이러한 교류를 근간으로 도출될 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소통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가 충돌할 때 비로소 새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민들이고, 그들이 가진 다양성이다. 이제 시민들의 손에 맡겨보자. 그들의 소통을 신뢰하고, 그로 인한 가치를 인지할 때 비로소 울산의 재도약 또한 가능할 것이다.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문화사업지원팀 차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