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세련 아동문학가

실존인물을 소설로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와 사실 간의 경계 때문이다. 사실에만 신경을 쓰면 전기문이 된다. 반면 허구가 지나치게 가미되면 역사왜곡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호생관 최북>(임영태, 문이당)은 성공한 작품인 듯하다. 최북은 소설적 요소가 많은 사람이다. 특유의 반골기질로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행동이나,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은 소설에 적합한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그럴싸한 인물 하나 슬쩍 집어넣어 기행의 결과로 이어지게 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다.

이 책은 이미 출간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다.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국의 화가에게도 눈길을 주던 끝에 만난 책이다. 무엇보다도 장점은 가독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고비가 느껴지지 않음에도 지루하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최북의 삶 전체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비범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리라. 감히 따라 하기도 힘들뿐더러, 따라 하고 싶지도 않은 행동들은 그가 기인임을 확신케 한다.

자존감 하나로 산 조선의 고흐. 자신의 이름자인 북(北)을 둘로 나눠서 자를 칠칠(七七)로 썼던 것도 자존감의 표현이다. ‘칠칠치 못한’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오히려 누구보다 ‘칠칠한’ 스스로를 내세운 것이었음을 그의 행보가 잘 말해준다. 그는 결코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후한 값을 쳐주거나, 자신이 생각한 값 이하의 가치를 매긴 그림은 다반사로 찢었다.

중인의 신분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도화서 화원을 영광으로 여기던 시대. 최북은 그런 제도권에 얽매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오직 견결한 성정으로 세상의 어떤 것과도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알았다. 때문에 스스로의 신분이 의식되면 저절로 주눅이 들곤 했다. 또한 그런 자신을 느끼게 하는 신분제도에 분노했던 최북. 그의 모습에서 상대적 박탈감에 곧잘 좌절하는 현대의 젊은이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좀 씁쓸하다. 그렇지만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었던 집념만은 현대의 젊은이들이 배웠으면 싶은 바람도 전한다. 장세련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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