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요리의 세계
레시피 상황별 활용 재판과 엇비슷
사건의 본질 살펴 합리적 해결 다짐

▲ 전기흥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판사의 근무지 변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진다. 평판사로서 지방 4년, 경기도 3년, 서울 8년의 근무를 마치면 부장판사가 된다. 부장판사가 되면 다시 지방으로 가서 2년을 근무하고 수도권으로 갔다가 일정 기간을 채우면 다시 지방으로 간다. 서울에서 근무할 때에도 2, 3년에 한 번 꼴로 동서남북으로 옮겨 다니니 평생 떠돌이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작년 2월에 부장 발령을 받아 울산으로 오게 되었고 가족과 떨어져 관사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처음에는 외로운 마음이 압도했다. 텅 빈 관사에 들어가기 싫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있는 것이 점점 편안하게 느껴졌고 고독을 사랑하기로 하였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퇴근 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거천을 느긋하게 거닐고 나서 관사에 들어가 무심히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데, 그날따라 ‘수미네 반찬’이라는 예능 프로에 끌렸다. 김수미가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요리를 뚝딱 만들어내면 유명 셰프들이 김수미한테 잔소리 들어가면서 따라하는 내용인데 너무 재미있었다. 요리가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요리라는 것을 감히 해보기로 하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요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고민의 고민 끝에 나의 생애 첫 메뉴를 계란찜으로 정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제일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동네 마트에 가서 육수 팩을 하나 사서 육수를 우려내어 계란을 풀고 30분간 약불에 중탕으로 쪄주었더니 횟집에서 나오는 계란찜의 모양으로 그럴싸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혼자서 환호를 했다. 조심조심 맛을 보았는데 맛이 있었다. 요리가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된장찌개를 해보기로 했다. 퇴근길에 파, 양파, 마늘, 고추, 버섯, 애호박, 감자, 두부를 사들고 갔다. 습관처럼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놓은 후 재료를 정갈하게 씻고 껍질을 벗기고 서툰 칼질을 했다. 전날 만들어 놓은 육수에 어머니 표 된장을 풀고 손질해 놓은 각종 재료를 넣어서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들렸다. 밥만 있으면 충분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온전히 스스로 한 끼를 해결했다는 뿌듯함이 차올랐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느낌이었다.

탄력을 받아서 김치찌개, 볶음밥, 불고기, 제육볶음, 잡채, 소고기 장조림에 차례로 도전했다. 김치찌개에서 쓰라린 맛을 보았으나 다른 요리는 대체로 먹을 만했다. 내가 만든 요리를 다른 사람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먹여보기로 했다. 1시간 넘게 걸려 완성한 소고기 장조림을 고등학생 딸이 신기한 듯 먹어 보고는 엄지를 척 올려줬다. 고맙고도 미안했다. 그리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요리는 다양한 재료를 다양한 방식으로 섞어서 맛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레시피라고 하는 것이 있기는 하나 재료와 상황에 따라서 레시피는 다양하게 응용되어야 한다. 레시피를 너무 따지다보면 맛이 활력을 잃는다. 수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재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있을 수 있으나 똑같은 사건은 있을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적용한 법리를 비슷한 유형의 다른 사건에 무리하게 적용하다보면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재판을 끝내고 퇴근한다. 오늘은 또 무엇을 해 먹을까 궁리하면서 새해 다짐을 한다.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이며 지속적으로 요리에 관심을 가져 건강한 음식을 다양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그리고 많은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 마음을 철저히 경계하여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 것이며 저마다의 사건의 본질을 살펴 분쟁의 합리적인 해결을 이루어내겠다고.

전기흥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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