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7. 인문학의 꽃 대곡천 백련서사

▲ 송나라 주자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武夷山) 일대에 아홉굽이의 절경을 선정해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이름을 지었다. 무이산의 무이구곡은 산과 산을 휘감아돌아가는 무릉도원으로 통하는 뱃길이다.

백련서사 지은 도와
비록 지방향반이었지만
성리학 경지 매우 높아
고위층과도 두루 교류
주자의 무이정사 본따
평생 교육·수행에 전념

도와가 꿈꿨던 이상세계
‘녹문’ ‘도화동문’등
바위에 새겨진 글자나
현판·문집 등으로 유추

구곡(九曲) 문화는 성리학(性理學)의 바탕 위에 쌓아올린 ‘인문학의 꽃’이라고 할만하다. 성리학은 공자의 예(禮)와 인(仁)에 새로운 우주의 질서를 도입한 새로운 유교이념이다. 여기에 도(道)와 불(佛)을 합쳐 그림과 시, 노래, 사상, 이상세계 등으로 인문의 지평을 크게 확장했다. 그런 면에서 태화강 상류의 대곡천은 인문학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곡천의 백련서사(白蓮書社)는 인문학의 요람이었다.

▲ 반구대 등을 휘감아도는 대곡천의 유장한 흐름은 중국 무이산의 무이구곡과 흡사하다. 대곡천에는 도와(陶窩) 최남복이 설정한 ‘백련구곡’, 반계(磻溪) 송찬규의 ‘반계구곡’이 있고, 누가 설정했는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구곡이 있다.

송나라 때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 1130~1200)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武夷山) 아홉굽이에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어 학문과 교육의 산실로 삼았다. 정사(精舍)는 원래 인도에서 불교 수양을 위한 건물 또는 거처를 의미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에서는 도교나 유교를 숭상하는 산천경개가 수려한 수행처로 의미가 바뀌었다.

주자는 무이정사에 은거하면서 정사 주변의 사물들을 노래했다. 이른바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이다. 잡영(雜詠)이란 여러 가지 사물을 읊은 시(詩)나 노래(歌)를 말한다. 주자는 이어 이 무이산을 돌아가는 아홉굽이를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이름짓고 배를 타고 구곡을 따라 유람한 뒤 그 유명한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를 지었다. 도가(櫂歌)란 노(櫂)를 저으면서 부르는 노래를 의미한다.

▲ 무이구곡도(1592년 이성길 作)

대곡댐 수몰지역에 있었던 백련서사는 조선 후기의 학자 도와(陶窩) 최남복(崔南復, 1759~1814)이 주자의 무이정사를 본따 지은 교육기관이자 수행처였다. 도와는 1792년(정조 16) 나이 34세가 되는 해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백련서사의 경치와 교육, 성리학 수행 등에 모든 삶을 바쳤다. 그 가운데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도와의 ‘백련구곡도가(白蓮九曲櫂歌)’는 울산 대곡천 인문학의 꽃으로 꼽힌다.

▲ 바위에 새겨진 ‘도화동문(桃花洞門)’

백련서사의 전면에 위치해 있는 백련정(白蓮亭)은 백련사(白蓮寺) 옛터 인근에 지은 것으로, 경주 부윤 박종우와 경상도관찰사 윤광안 등이 산을 사들이는데 2000냥을 지원해주는 등 큰 도움을 줬다. 이처럼 도와는 비록 생원시에 합격한 지방 향반이었지만 그 성리학의 경지는 매우 높았고, 교우 관계는 경상도관찰사 윤광안 같은 고위층들이 수두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련정의 정취는 도와의 ‘백련구곡도가’ 제5곡(曲)에 그림처럼 묘사돼 있다.

오곡(五曲)은 높다란 바위굴로 형세가 매우 깊숙한데
서재가 우뚝하게 성근 숲에 걸려 있네.
그 속의 참된 즐거움을 누가 알리요?
석 자의 거문고는 태고(太古)의 마음을 머금었네.

▲ 도와가 대곡천 백련서사 인근‘사자목’ 바위면에 새긴 ‘녹문’

우리나라 최초의 구곡시(詩)는 소요당(逍遙堂) 박하담(1479~1560)이 창작한 ‘운문(雲門)구곡’과 ‘운문구곡가’. 소요당은 1536년 울산 인근인 청도 운문산과 동창천의 절경을 구곡으로 설정해 시를 지었다. 이어 이황(1501~1570)이 안동에 도산구곡을, 율곡 이이(1536~1584)는 황해도 해주에 석담구곡을, 한강 정구는 무흘구곡을, 우암 송시열은 화양구곡을 설정해 시가를 읊고 이상세계를 노래했다.

도와가 남긴 이상세계는 현판과 각석, 문집 등에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도와는 대곡천 백련서사 인근 ‘사자(獅子)목’을 ‘녹문(鹿門)’로 이름을 고치고 그 바위면에 글자를 새겼다. ‘녹문(鹿門)’이란 중국 호북성 양양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나라 때 방덕이 녹문산에 은거한 이후부터 은둔의 성지가 됐다. 이 곳에 살고 있던 방덕은 형주의 유표가 벼슬을 권하자 ‘남들은 위태로운 부귀를 물려 주지만, 나는 편안한 농사짓기를 물려 주려오’하면서 거절했다. 당나라 때 시인 맹호연도 녹문에 은둔했다. 대곡댐 건설로 이 일대가 수몰되자 주민들이 글자가 새겨진 바위면을 그대로 떼어내 옮겨 왔다. 이 바위는 대곡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도와선생문집>에 ‘녹문’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다.

물 빛깔과 산 그림자가
겹겹이 녹문(鹿門)을 닫아거네.
수레 바퀴자국으로
흰 구름의 흔적을 깨치지 못하게 하라.

도와는 또 백련구곡을 무릉도원이라고 보고 인근 바위에 ‘도화동문(桃花洞門)’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지금은 댐에 수몰됐지만 <도와선생문집>에는 같은 이름의 시가 남아 있다.

삼월에 비가 새로 개니
붉은 놀이 골짜기에 가득 타오르네.
봄바람아 불어서 떠나가지 말아라.
산 밖에는 물고기 잡는 배가 많단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사진 출처=울산대곡박물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