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숙원사업' 상고법원 설치·법관 해외파견 확대 요구

▲ 박근헤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5년 10월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경축연에서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가운데 가장 충격을 준 것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놓고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벌인 이른바 '재판거래'다.

양승태 사법부는 한·일 관계를 우려한 박근혜 정부 요청에 맞춰 강제징용 소송을 지연시키거나 결과를 뒤집으려 시도하고, 그 대가로 상고법원 설치·법관 해외파견 확대 등 역점 사업을 관철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법부 최고위급 법관들이 '조직이익'을 위해 뛰는 동안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물밑 작업'이 이뤄진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다 하나둘 세상을 떴다.

지난해 10월 일본 전범 기업(신일철주금)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왔다. 부당한 재판지연 등으로 인해 소송이 마무리되기까지 무려 13년이 걸렸다. 원고 4명 중 이춘식(95) 씨만이 생존해 결과를 지켜볼 수 있었다.

▲ 굳은 표정의 양승태(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밖으로 나서고 있다. 2019.1.23 jjaeck9@yna.co.kr

◇ '상고법원 BH 대응전략' 문건 나오며 수면 위로

수면 아래 묻혀 있던 강제징용 '재판거래' 의혹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5월이었다. 양승태 사법부가 '판사 블랙리스트'를 관리했다는 의혹을 법원이 자체조사하는 과정에서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 문건이 공개되면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가 2015년 3월 작성한 이 문건에는 이병기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접촉해 양 전 대법원장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설치를 설득하는 내용이 담겼다.

문건에는 이 전 비서실장의 최대 관심사가 '한일 우호 관계의 복원'이며 그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사건에 대해 청구기각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기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박근혜 청와대가 일본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고등법원 판결을 대법원이 파기해 줄 것을 기대했고, 양승태 사법부는 이를 인식한 데서 더 나아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거래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의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 검찰 수사에서 속속 드러난 '거래' 단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2000년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부산지법에, 2005년에는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2심은 패소했으나 대법원은 2012년 5월 일본기업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며 사건을 서울·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며 개인 손해배상 청구권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했다고 본 정부 입장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파기 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신일철주금이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신일철주금은 재상고했고, 사건은 다시 대법원이 넘겨받았다.

불과 1년 전 대법원이 한 차례 판단을 내린 만큼 결론은 '원고 승소'로 사실상 정해져 있고 신속하게 판결이 확정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하지만 대법원으로 간 사건은 무려 5년간 감감무소식이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던 재판 지연 이유는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2013년 2월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강제징용 소송에 대한 입장은 이명박 정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주도한 점 등을 의식해 소송 결과가 번복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런 정부 뜻에 부응하는 대신 상고법원 등 현안 처리 과정에서 도움을 받으려 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재판을 '거래수단'으로 삼은 셈이다.

대법원(법원행정처) 고위 간부들이 2013∼2016년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등 박근혜 정부 인사를 수차례 만나 강제징용 소송 결과를 논의한 정황이 속속 발견됐다.

▲ 승소 판결받은 강제징용 피해자(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인사하고 있다. 2018.10.30 yatoya@yna.co.kr

◇ 전범기업 대리 '김앤장'과 양승태 직접 접촉

양승태 사법부는 먼저 법관 해외파견 확대를 우선 과제로 삼았다. 대법원은 외국 사법부와 교류 확대 등을 명목으로 미국·오스트리아 대사관에 판사를 보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파견이 끊긴 상태였다.

법원행정처가 2013년 9월 작성한 '강제노동자 판결 관련 외교부와의 관계' 문건에는 '판사들의 해외 공관 파견'과 '고위 법관의 외국 방문 시 의전' 등을 대가로 기대하며 "외교부를 배려해 절차적 만족감을 주자"고 적은 대목이 나온다.

2013년 10월에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주철기 당시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강제징용 소송 방향을 설명하고 법관 해외파견을 늘려달라고 부탁한 정황이 드러났다.

2013년 12월과 2014년 10월에는 차한성·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각각 김기춘 전 비서실장 공관에 불려갔다.

이 자리에서 윤병세 전 장관이 기존 대법원 판결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를 했고, 참석자들은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한 뒤 진행을 늦추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심리는 기존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거나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일 때 이뤄진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소송에 개입한 정황도 다수 파악됐다.

그는 강제징용 소송 주심을 맡았던 김용덕 전 대법관에게 "배상 판결이 확정되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취지를 전했다. 이에 김 전 대법관은 재판연구관에게 기존 승소 판결을 뒤집을 논리를 개발하라고 지시한 정황이 포착됐다.

양 전 대법관은 미쓰비시·신일철주금을 대리한 법무법인 김앤장 소속 한상호 변호사와 대법원장 집무실 등에서 세 차례 이상 독대하며 소송 절차를 논의한 의혹도 받고 있다.

강제징용 소송 심리가 계속해서 미뤄지는 사이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최종적·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담은 한·일 위안부 협상을 타결했다.

양승태 대법원은 2016년 11월에야 강제징용 소송의 전원합의체 회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고, 그해 말 박 전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처하며 법원행정처와 청와대 사이의 '재판거래' 논의는 중단됐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은 정부와 대법원장이 모두 바뀐 이후인 지난해 10월 나왔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 8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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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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