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동은 하부면에 속하며 백련암(百蓮岩)이 있어 연암이라 했는데, 1914년에 상방동을 병합해 연암리로써 하상면에 편입됐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돼 동이 됐다. 오봉산 기슭에 신라 때 세워 용왕에게 나라의 수호를 빌었다는 오봉사(五峯寺)가 있다. 지금은 옥수청청 좋은 물이 흐르는 샘이 있어 옥천암(玉泉庵)으로 불리는 곳이다.

 어느 해의 일이었다. 이웃 병영사람들이 이곳에 놀이를 왔다. 그러나 실은 놀이를 빙자해 추모제를 드리러 온 것이다. 병영은 조선시대 태종(太宗) 17년(1417) 병마절도사영이 옮겨 온 곳이고 그 뒤로도 한말에 이르기까지 500년의 긴 세월동안 나라를 지키는 군사기지로써의 역할을 맡아왔다. 나라의 방패가 돼왔던 병영사람들은 그 기질 또한 남다른 데가 있어 일제치하인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을 외치다 엄준(嚴俊), 문성초(文星超), 주사문(周士文), 김응룡(金應龍)이 일제수비대가 쏜 총에 순사하고, 22명의 청년들이 형을 받은바 있다. 2년 내지 6년의 옥고를 치르고 돌아온 그들은 기미계(己未契)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해마다 4월 6일이 되면 왜병의 총탄에 순직한 네 분을 받들어 제사를 올리며 그 혼을 달래 왔다.

 어느 해의 일이었다. 그 날도 비밀리에 연암동의 오봉사에 모여 제사를 지낸 뒤 뒤풀이 놀음을 벌이게 돼 있었다. 이제 막 음식을 차려 놓고 모두 모여 음복을 하려는 순간, 몰래 따라와 바위위에 숨어서 지켜보던 양문이라는 사람이 졸고 있다가 그만 술판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절한 양문이를 업고 병원으로 가고, 제사상이 박살이 나 난장판이 된 그 해의 행사는 깨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는 불청객이 찾아와서 판을 깨려 할 때면 "오봉사 놀음은 양문이가 깬다더니"하는 말이 생겨났고, 또 좀 모자라는 사람을 두고서도 "이 사람 양문이 아닌가"하는 말로 놀리게 되었다고 한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드로아(터키 지방)라는 곳에서 밤이 깊도록 강론을 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생각지 못한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유두고라는 청년이 다락 3층 높은 곳에서 졸다가 떨어져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바울이 급히 달려가 그 청년의 생명을 살려주었다. 어느 순간 졸아 떨어지기는 했으나 말씀을 듣고자하는 열의를 가상히 여긴 것이다.

 우리의 양문이도 절차에 따라 제사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기가 지루했던지 그만 졸다가 떨어져 기절했다. 비록 제사상은 깨지고 뒤풀이 마당도 난장판이 되었지만, 그 역시 병영사람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의분에 찬 심정으로 일행을 부지런히 뒤따라왔다가 잠깐 실수를 한 것이리라. 불같은 호기심과 열의을 지닌 채 실수를 해대면서도 대활약을 펼치는 그의 후손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어느 행사든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부지런히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런 열의와 정성을 높이 평가해주지는 못할망정 현대판 "양문이"라 빗대어 놀리기만 하는 이들이 많다. 오래 전 한번 저지른 실수를 용납해주지 못하고 두고두고 조롱만 하는 것은 연거푸 그를 욕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니 이는 결코 참된 군자의 도리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