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호 철학박사

대학 밖, 강연 또는 독서 모임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가정을 갖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강의를 듣는 이유를 물으면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한 때는 직장 얻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한 때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큰 목표였다. 세월은 흘러 직장도 얻고, 첫 월급을 부모님께 드리며 함께 누리던 기쁨도 기억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되었고, 결혼도 해서 자녀도 얻었다. 어느덧 진급도 하고, 자녀들은 성장해서 제 삶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니 뭔가 모를 느낌이 그 길의 한 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공허함’이라는 괴물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재산도, 건강도, 친구도 필요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학자 세네카는 말한다. 백발과 주름살만 보고 어떤 사람이 오래 살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왜냐하면 그는 단지 오래 생존한 것일 뿐 오래 산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생존도 하지만 삶을 산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능력이 만개되도록 노력하고, 그와 더불어 정신이 풍요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의 유명한 실험 중에 책상 위에 먹지 못하는 물건을 올려놓은 다음,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로 슬쩍 바꿔서 올려놓는 실험이 있다. 침팬지들은 케이크를 먹으려고 하지만, 6세 정도 되는 미취학아동들은 호기심을 보인다. 왜 못 먹는 물건이 케이크로 변했을까? 인간의 강한 지적 호기심이 본능을 통제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알기를 원한다. 내가 누구인지, 뭐가 더 가치 있는지, 뭐가 더 옳은지, 뭐가 진실이고 진리인지, 예술이 뭐고 죽음이 뭔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성찰하기를 원한다. 단순히 재산과 건강, 좋은 집과 많은 친구들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단지 생존하고 있는가? 아니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이 불멸하다면, 인문학도 불멸할 것이고, 이 물음이 영원토록 빛난다면, 인문학도 영원토록 빛날 것이며, 그에 참여하는 삶도 고귀해질 것이다. 김남호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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