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혼자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덕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김기림 시인의 ‘길’이라는 시다. ‘그 길 위에서 내 첫사랑도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그렇게 잃어버렸다’는 표현에서 나는 그만 울컥해지고 말았다. 누군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 중의 하나가 ‘길’ 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슬플 지, 아니면 기다리는 일이 슬플 지… 하며 묻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둘 다 슬픈 것은 매 한가지 일 테지만,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리움 때문에,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보는 것, 그게 아마도 더 슬픈 일일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우린 지금까지 얼마나 수많은 길을 거쳐 왔는지,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과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내고, 잃어 버렸는지….

며칠 전 밤 10시가 다 돼서 같은 동네에 사는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우린 늘 그렇듯 희망(HOPE=BEER. 우린 그렇게 여기고 있다)을 함께 따르며 후라이드 치킨을 먹었다. 아무 이야기도 없이 그저 먹기만 하다가, 대뜸 ‘요즘 왜 이래 사는 게 힘드냐. 재미없냐’ 하는 거였다. 순간 나도 막막하여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뭐 다 그런 거지) 잔만 채워주었다. 다시, 지나간 어린 시절을 하염없이 떠올리기도 하면서 고등학교, 대학시절, 군대시절, 군대 가기 전에 만들었던 추억들도 이야기 하면서,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제일 좋은 줄만 알았던 어린 시절 우리가 살았던 동네도 빛이 바래 낡아져 가고, 뜨거운 햇빛아래 캔 하나먹고 그저 잠시 자기를 속여 두는 걸로 만족해야 할 나이가 돼버렸는지, 그러다 하나 둘 나이가 들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우리들은 오래된 동네를 떠나갔다.

작년에 오랜만에 3학년 담임을 하게 된 나는 내일이면 졸업식을 앞두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의 마지막 한해를 함께 보낸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는 시간. 누군가는 대학엘 진학하고, 누군가는 더 좋은 날들을 위해 재수의 길을 택하고…. 학생회 임원 학생이 내일 졸업식에 보여줄 영상을 만든다며, 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했다. 그들의 삶에 환한 벚꽃 속을 거닐 그런 날들이 있기를, 은총 같은 봄 햇살이 가득하길. (인간의 감정은 누군가를 만날 때와 헤어질 때 가장 순수하며 가장 빛난다.)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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