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9. 대곡천에 핀 불교문화(중)

▲ 천전리사지에 있었던 절에 묵었던 승려들은 천전리 각석 바위 표면에 각종 글씨를 새겨 불교 메시지를 남겼다. 이 절에는승려뿐만 아니라 화랑, 관료, 귀족 등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천전리 각석 일대에서 유람을 하거나 연희를 베풀었다.

반구대암각화 최초 발견 동국대 문명대 교수
울산 불교역사 실마리 찾으려 반고사터 추적
1970년대 대곡천 일원 뒤지다 암각화 찾아내

천전리각석 맞은편에 위치한 천전리사지
통일신라시대 추정 기와·토기편들 발견돼
반구대에 있었던 반고사, 원효 머물렀던 절
조선 후기 그 자리에 반고서원이 들어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무너진 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곡천을 따라 올라가니 건너편 절벽에 희미한 무언가가 보였어요. 가까이 가서 이끼와 흙탕물을 걷어내고 보니 마름모꼴 기하학적 무늬들과 신라시대 화랑들의 이름이 적혀있더군요.”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당시 반구대 암각화가 아닌 반고사터를 찾으러 갔다. 문 교수는 원효가 머물던 이 반고사터를 찾기만 하면 울산 불교 역사의 실마리가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을 이끌고 대곡천을 이 잡듯이 훑어 나가던 차에 천전리 각석(암각화)을 발견하게 됐다.

▲ 반고서원 유허비 일대에 있었던 반고사

이어 1년 후인 1971년 12월25일 천전리 각석 하류 쪽에 또하나의 암각화를 발견했다.

“동네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가다가 낮잠을 자는 곳이 있는데, 누우면 천장에 호랑이 그림, 물고기 그림들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다음해 크리스마스 날인 12월25일 제보대로 대곡리에 가보니 그 곳에 정말 암각화가 있었어요. 당시 배를 타고 갔는데 멀리서 봐도 암각화에서 반질반질 빛이 났죠.”

이는 동국대 문명대 교수가 반구대 암각화를 어떻게 발견했는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 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한 것은 우리나라 암각화의 신기원을 여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문 교수는 반고사 터를 찾는 대신 2년에 걸쳐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찾게 됐다.

▲ 반고서원 유허비 일대에 있었던 반고사(위). 원효는 이 반고사에 묵으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 이후 반고사는 폐사되고 그 위에 반고서원이 들어섰다. 천전리사지는 천전리 각석이 바라다 보이는 계단식 논들 가운데 있다. 이 곳에서는 공룡발자국과 천전리각석, 기암절벽 등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그런데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 반구대 암각화는 바로 대곡천변에 서 있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대곡천변에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각석 못지 않는 불교유적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반고사(磻高寺)터와 천전리사지(川前里寺址) 말이다.

◇천전리 각석을 바라보는 천전리사지(川前里 寺址)

천전리 각석 인근에서 발견된 ‘무너진 탑’은 ‘천전리사지(寺址)’로 이름이 붙여졌다. 불교 관계자들은 이 절터를 반고사로 부르기도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반고사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지금도 그냥 ‘천전리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천전리사지는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 건너편의 계단식 논에 있다. 계단식 논 위쪽의 복숭아밭에서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됐고, 이 유물의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됐다.

이 절은 그 위치로 보았을 때 통일신라시대 천전리 각석을 찾아온 승려나 귀족, 관리, 화랑 등이 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내용을 살펴보면 승려들이 여럿 왔다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 군데군데 보인다.

지난 휴일 대곡박물관에 들렀다가 동향원(지체장애아 수용시설)을 지나 천전리 각석 앞 대곡천 앞에서 왼쪽 논들을 돌아보았다. 겨울 바람이 황량하게 불어오는 논둑으로 올라서서 논 위쪽 복숭아밭에 발을 디뎠다. 메마른 수풀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는 밭 한가운데 탑 부재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계단식 논들이 절터라고 생각하니 저 건너 바라보이는 기암절벽과 절경이 가히 절터 명당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등(塔嶝)’이라고 불리는 이 밭둑에 서서 남쪽 대곡천을 바라보니 천전리 각석의 옆면이 보인다. 스님들은 이 천전리 각석에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글자들을 새기고 이 절에서 천전리 각석에 새겨져 있는 신라 왕족들의 연애담을 곱씹으며 하룻밤을 묵었으리라.
 

▲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원효대사 진영(眞影). 원효는 반고사에 묵으면서 스승 낭지의 명을 받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울산 불교사를 새로 쓰는 반고사터(磻高寺址)

아래쪽에 있는 반구대 일원 절터는 그냥 행정구역 명칭을 따 ‘대곡리사지(大谷里寺址)’라고 부르다가 이 곳에서 불상이 발견됨으로써 ‘반고사터’로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 <울산읍지>(1934) 불우(佛宇)조와 <흥려승람(興麗勝覽)>상(1937) 불우조는 “반고사는 반구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반고사는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반고사 절터에 반고서원(반구서원)이 건립됐다.

반고사가 있었던 반구대는 거북이 머리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반구대에 있는 이 반고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승 원효가 머물렀던 절이다. 원효는 이 절에서 스승인 낭지(朗智)의 명을 받아 왕성한 저술 활동을 벌였다.

대곡천변에 있는 절터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상류부터 백련사지(白蓮寺址·방리사지), 장천사지(障川寺址), 천전리사지(寺址), 반고사지(磻高寺址) 등 4곳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백련사와 인근의 절경은 대곡천 백련구곡의 원류라고 할만한 불교문화의 시원(始原)이었고, 장천사는 엄청난 위상을 가진 대곡천변의 대찰이었다.

대곡박물관 신형석 관장은 “대곡천변의 절터를 보면 대부분 대곡천의 굴곡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이 지점들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대곡천 상류의 백련사나 장천사, 천전리사지, 반고사지 모두 대곡천 물이 휘황하게 돌아가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후 백련사 자리에는 백련서사(백련정)가 들어섰고, 반고사 자리에는 반고서원이 들어섰다. 신라 때 지어진 절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다가 조선시대 때 억불정책에 따라 사찰이 폐사되거나 서원이나 서사 등 유교 교육기관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대곡천의 물은 유장하게 흐르는데, 대곡천 기암절벽은 굽이굽이 철따라 선경을 이루는데,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불교는 안된다느니 유교를 반드시 받들어야 하느니 말들이 많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사진출처=울산대곡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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