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주은 전 울산과학대 교수·국문학

관객 28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말모이’ 덕분에 국어사전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일제강점기 국어사전 편찬 운동이 우리말 보존이면서 애족운동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 것이다. 국어사전 발간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한 최경봉 교수는 <우리말의 탄생>에서 “우리말을 진정한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약속과 규칙의 체계를 규범화해야 한다”며 “이 규범화의 결정체가 사전”이라고 정의했다.

1907년 국가어문교육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창립되어 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으나 사전 출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후 우리말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이 우리 민족을 보존하는 것이라 믿는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결성한다. 이 연구회에서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창립되어 사전 편찬 사업을 본격화했다. 모국어를 지키고 정리함으로써 민족혼을 살리자는 조선어 규범화와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은 범 사회적인 호응 속에 민족적 과업으로 자리매김했다.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 등을 발표하면서 사전 초고가 완성되었으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회원들이 검거되는 과정에서 사전 원고도 압수당했다. 광복이후 조선어학회가 재건되면서 사전 원고를 1945년 9월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찾았다.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적혀있는 상자에는 1929년부터 3년 동안 공들여 완성한 조선어사전 원고 2만6500여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한글 마춤법 통일안
 

이 원고는 1945년 8월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상고심 재판의 증거물인데 창고에 방치돼 있다가 직원이 발견한 것이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1947년 10월9일 <조선말 큰사전> 첫째권 반포식을 서울 청운동 천도교회관에서 거행하였다. 이후 1957년에 6권이 최종 완간되었다. 조선어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한글 사랑과 사회사업가들의 후원이 사전 편찬에 원동력이 됐다. 일제의 만행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켜온 최현배와 김선기, 정인섭, 이극로 등 애국지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윤주은 전 울산과학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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