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통치 고발·독립정당성 알려

무관학교 설립비용등 군자금도 모아

울산향교, 3월7일 기념행사등 마련

울산에 후손 없어 자료수립 어려워

▲ 학성이씨 족보에 올려진 이규린.
“파리장서운동의 ‘울산유림 이규린(李奎麟)’을 아십니까?”

올해가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라는 사실은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다. 하지만 유림의 독립항쟁인 ‘한국유림 파리장서 독립운동’(韓國儒林 巴里長書 獨立運動·일명 파리장서운동)이 같은 시기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파리장서운동(1919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나던 방방곡곡 만세운동과 맥을 같이 해 전국의 선비들이 벌였던 ‘붓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거사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결산하는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2674자의 장서를 보내 일제식민통치의 만행을 고발하고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촉구하는 독립투쟁이었다. 영남과 호서를 중심으로 전국의 명망있는 유림 137명이 목숨을 걸고 이에 동참했는데, 그 중에 울산유림 이규린(李圭麟)도 있었다.

이규린은 1856년 아버지 이하찬(李夏燦)과 어머니 박용당(朴用堂)의 차남으로 울산시 울주군 웅천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능통한 유학자인 그는 울산에서 태어났으나 1937년 타계한 곳이 양산시 주남동이다보니, 양산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파리장서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유림은 심산 김창숙을 파리로 파견하려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문서를 이미 파리에 파견돼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했다. 하지만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체포되며 이 일이 발각됐고, 이규린 역시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그의 항일운동은 출옥 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1926년 김창숙의 밀명으로 정수기와 함께 무관학교 설립 비용과 내몽고 지방의 황무지 매입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 일본 경찰에 또다시 검거돼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지난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최근 울산향교 유림회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파리장서운동과 이규린을 알리기 위한 움직임에 들어갔다. 지난 1월 성균관에서 열린 ‘유림 독립항쟁 파리장서 100주년’ 발기인 대회에 참가한데 이어 오는 3월7일에는 울산향교 유림회관에서 관련 기념행사도 마련한다. 더 나아가 4월16일에는 성균관명륜당과 234개 향교명륜당에서 열리는 전국동시 추모행사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울산 유림의 독립운동자료를 모아 온 울산유림 엄주환(전 구강서원 이사장) 성균관 부관장은 “‘파리장서’ 100주년을 맞아 기억해야 할 울산유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이규린”이라고 했다. 엄 부관장은 “그가 모금운동을 활발히 벌일 수 있었던 이면에는 맏사위 엄계영(嚴啓永)과 조카 주철(柱澈)의 도움이 컸다. 당시 온산읍 산성에 살았던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이규린의 지시로 많은 돈을 군자금으로 내어 놓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의 후손들이 울산에 있지않아 자세한 자료를 모으는데 시간이 걸리는 중이며, 향후에는 심산 김창숙과 연계한 지역 유림들과 독립활동 관련 장소들을 묶어 새로운 역사문화자료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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