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항일운동가 성세빈·보성학교 재조명-(상)재평가 시급한 성세빈의 삶

▲ 성세빈 선생은 1938년 6월25일 향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가족들에 의하면 성 선생이 분사(憤死)했다고 알려졌으나 뚜렷한 사망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성 선생의 장례식에는 민족대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울에서 울산까지 와 참석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일제시대 울산지역 대표 교육자이자 항일운동가인 성세빈 선생과 동구 보성학교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성세빈 선생은 행적 이상을 이유로 정부로부터 서훈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성세빈 선생이 설립한 동구의 보성학교 역시 현충시설로 지정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그나마 울산시교육청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교육 관련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등 항일독립운동 역사찾기 사업에 나서면서 오는 5월15일 스승의 날에 맞춰 성세빈 선생을 참스승으로 선정해 소개할 예정으로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본지는 이에 성세빈 선생과 동구 일대 항일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보성학교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과 그에 걸맞는 평가가 이뤄질 수 있도록 기획을 마련했다.

동구에 첫 야학 설립해 문자보급운동
농촌계몽·교육운동분야 활발한 활동
보성학교 세워 항일·독립운동가 양성
교원이었던 서진문·이효정은 서훈

일제가 요시찰 인물로 주목했음에도
1930년대 어업조합·양조회사 경력탓
식민정책 협력 의심 서훈대상서 제외
“당시 지역상황 파악 못한 평가” 지적

일제강점기 때 울산 동구 일대는 어족자원이 풍부해 거제도의 장승포, 부산의 영도와 함께 대표적인 식민지 전진어업기지이자 일본제국주의 수탈의 중심지였다. 1909년 일본 후쿠오카현 지쿠호 수산조합 어부들이 일본가옥 30호를 짓고 처음 이주를 시작한 이후로 1921년에는 방어진 이주 일본인만 3000여명이 넘을 정도로 일본인 이주가 활발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일제침탈에 맞서기 위한 항일 운동의 궤적이 뚜렷이 나타난 지역 역시 동구이다.

▲ 신간회는 1920년대 후반에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로, 성세빈 선생은 1928년 3월17일 창립한 신간회 울산지회 창립 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4월에는 신간회 울산지회 설립 1주년 기념사업인 민간교육공로자로 선정돼 표창을 받기도 했다. 붉은 선 안이 성세빈 선생.

◇민족교육·항일운동의 근거지 보성학교 설립자이지만 독립유공자 인정 안돼

울산에서 유일하게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유지되면서 수많은 학생을 배출하고 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민족사립학교 ‘일산리 보성학교’도 동구에 위치해 있다.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보성학교에서는 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됐는데 동구 출신으로 유일하게 서훈을 받은 서진문 선생(건국훈장 애족장)과 이효정 선생(건국훈장 포장) 역시 보성학교 교원 출신이다.

▲ 성세빈 선생

그러나 정작 당시 보성학교를 설립하고 보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민족교육에 헌신했던 일산리 출신 성세빈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미서훈 상태로 남아있다. 미서훈 이유 중 하나는 ‘행적이상’이다.

성세빈·성세륭 선생의 서훈을 신청했던 후손 성의영씨가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공문에는 성세빈 선생이 1930년대 초 어업조합과 양조회사 등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식민정책에 협력하는 경우로 보여 포상에서 제외된다고 적혀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 공적심사 기준 중 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일제강점기 공직·조합 등 근무)에 협력한 경우는 포상에서 제외된다는 기준이 있는데 성세빈 선생이 보성학교 교장직을 그만둔 직후 방어진주조주식회사 감사직과 어업조합에 속했던 경력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

◇‘행적이상’ 미서훈…지나친 확대 해석

이에 대해 지역 역사학자와 시민단체들은 보훈처가 당시 동구 일대 상황과 전후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단순하게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장세동 동구지역사연구소장은 “방어진주조가 설립될 당시엔 일본인과 조선인의 합자회사였으나 이후 화정리 출신의 조선인 자본가 윤덕호가 회사를 운영했고 간부진도 전부 조선인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발행된 부산일보와 동아일보 기사 등에 따르면 방어진주조는 1929년 8월 동면지역에서 최초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합자회사였으나, 창립자 중 한명이었던 윤덕호가 1932년 일본인 지분을 전부 매수하며 조선인 대표와 간부진을 둔 조선인 회사로 재탄생했다.

이현호 울산교육 독립운동 역사찾기 연구회 회장은 “성세빈 선생이 일제 탄압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난 직후 교장이 윤덕호의 동생 윤덕조였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성세빈 선생을 기리기 위해 회사에 이름만 올렸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실제로 당시 성세빈 선생은 울산신간회 활동을 포함해 지역 청년활동에서 핵심 역할 수행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성세빈 선생의 이름이 어업조합의 활동과 관련해 언급된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1933년 일제가 요시다라는 일본인을 이사에 앉히고 어업조합을 통제하려는 것에 조선인들이 대항 집회를 열었을 때다. 당시 조선인들이 지역의 항일운동가인 성세빈 선생에게 진행을 부탁했던 것 외에는 어업조합에서 활동한 기록이 없는데 이것을 문제 삼는 건 어불성설이다”고 덧붙였다.

선생이 보성학교 설립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항일운동을 펼쳐왔던 점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크다.

선생은 일산리 향리 출신으로 일찍부터 한학과 신학문 공부에 몰두하다가, 3·1운동 이후 항일정신 계승과 실력양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야학 설립이 이어지자 28살이 되던 해인 1920년 4월 일산리에 처음으로 노동야학을 만들어 문자보급 운동을 펼쳤다. 비슷한 시기에 동면 지역에서 처음으로 동면청년회를 창립한 것도 성세빈 선생으로 알려졌다.

▲ 성세빈 선생의 친조카 성의영씨가 국회도서관 등을 방문해 직접 찾은 ‘조선의 요시찰 인물 경성 종로경찰 조사서’에는 성세빈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일제도 요시찰 인물로 적시한 독립운동가

성세빈 선생은 울산군청년연맹 집행위원과 검사위원, 동면지역 청년단체인 5월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신간회 울산지회 초대 부회장과 집행위원 등을 지내며 항일투쟁과 농촌계몽, 교육운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이같은 단체들은 지역 청년들의 문맹퇴치는 물론 항일의식을 불어넣는 항일·독립운동의 주체였다.

특히 경성종로경찰에서 일본으로 보냈던 ‘조선의 요시찰 인물 경성 종로경찰 조사서’에 성세빈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점 등을 보면 선생이 울산 지역 대표 항일·독립운동가로 일제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보훈처 역시 선생이 보성학교를 세우고 신간회와 청년회 등에서 항일·독립운동 활동을 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는 상태다.

배문성 보성학교 복원 시민모임 기획실장은 “성세빈 선생은 동면 지역 조선인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우고 조선인 교육에 힘을 써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만큼 울산 지자체들도 일제강점 당시 독립·항일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공적을 기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주기자 khj11@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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