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뒤늦게 울산으로 전해졌다. 맨 먼저 4월2일 언양에서, 다음 4월4일 병영에서, 마지막으로 4월8일 남창에서 차례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올해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0년이다. 울산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의 자취를 다시 더듬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울산지역 3곳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내용과 전개, 정신 등을 한데 모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책을 편찬하고, 제대로 된 영상물을 만들어 후대에 물려줄 필요가 있다.

울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은 크게 두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번째는 공간적으로 서·북·남쪽에서 차례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언양의 경우 서쪽에 위치해 있는 최대의 인구 밀집지였고, 병영은 조선시대부터 군사기지가 위치해 있었던 요충지였으며 남창 또한 조선 때부터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큰 고을이었다. 장소도 언양과 남창은 주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5일장이었고 병영은 울산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병영초등학교(일신학교)였다.

두번째는 울산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의 주도세력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언양에서는 천도교 신자들이 주도했고, 병영에서는 병영청년회가 모든 준비를 했다. 남창에서는 학성 이씨 문중이 주도를 했다. 언양의 천도교 신자들은 울산은 물론 서울까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의식이 다른 종교 집단에 비해 월등했다. 병영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병영청년회도 일반 민중에 비해 민족적인 울분이 높았다.

남창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성 이씨 가문은 울산지역 최대의 가문으로, 이전부터 울산지역 유림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림의 문중 원로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남창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온양면과 웅촌면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던 학성 이씨 가문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울산에서 일어난 3곳의 만세운동은 장소와 주도세력 면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울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가치와 내용을 시민들이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쉽다. 특히 2000여명 이상이 모인 언양 만세운동은 울산 최대의 운동이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작천정 일대에 만세운동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어도 이를 제대로 살펴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금 새겨볼 일이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