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호 철학박사

사바나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숫사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지금 저 멀리서 어미를 잃고 울며 떠도는 새끼 사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그에게 가능한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새끼 사슴을 잡아 먹든지 아니면 상관하지 않든지. 물론 그의 의식 속에는 ‘새끼’ ‘가젤’ ‘잡아 먹다’ ‘상관하지 않다’와 같은 개념들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 숫사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지 못한다. ‘나는 왜 가젤을 잡아 먹으려 하는가?’ 혹은 ‘나는 왜 가젤을 그냥 놔두려 하는가?’라고 묻지 못한다. 그의 의식은 늘 외부로만 향해 있을 뿐, 자기 내면으로 방향을 틀지 못한다.

의식이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되면 비로소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 풍경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내가 느끼는 느낌’ ‘내가 생각하는 내용들’ ‘내가 후회하고 소망하는 것들’이 비로소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우리는 이 새롭고 놀라운 ‘나의 풍경’ 속에서 수많은 문학 작품을, 미술 작품을, 노래를 만들어 왔으며, 철학을 해왔다.

“철학은 놀라워하는 것 그 이외의 기원을 갖고 있지 않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놀라워 하는 것이 철학의 기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가? 시계를 보며 늘 시간에 대해 말해 왔지만, ‘그런데 시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축구 경기를 보고, 지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영화관에서 영화도 봤지만, ‘물질로 이뤄진 우주에서 어떻게 축구 경기가, 결혼식이, 언어가, 의무와 도덕이 나왔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철학자 존 설(J. Searle)은 놀라워했다.

익숙하던 ‘나의 풍경’에 벼락이 치고 폭풍이 몰려 오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 위험한 순간에 우리는 마치 더 안전한 대피소를 찾아가듯, 더 흔들리지 않는 앎을 위해 헤맬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움에 사로 잡혀 끊임 없이 더 확실한 앎을 추구하려는 전인격적인 몸부림, 그것이 바로 앎(소피아)에 대한 사랑(필로스), 즉 필로소피(철학)이다. 김남호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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