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항일운동가 성세빈·보성학교 재조명 : (하) 황량한 터만 남은 보성학교

▲ 1929년 3월1일 보성학교 학생들과 교원들이 3·1절 10주년을 맞아 보성학교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1909년께 기금모금 통해 처음 설립
일제 탄압으로 1912년 이전에 폐교
성세빈 선생 앞장서 1922년 재개교
1945년까지 졸업생 499명 배출해
울산서 유일하게 지속된 사립학교
항일독립운동가들 교원으로 근무
청년운동단체들 사무실로도 활용
일제 폐교 압박에 교습소 격하까지
상징성에도 현충시설 미지정 ‘홀대’
교장 성세빈 선생 미서훈 영향 커

“보성학교 설립자를 위시해서 거기에서 교편을 잡은 선생님들이 한 사람 빠짐없이 전부 애국자이고 독립운동가고 그런 사람들이다. 근데 그 학교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제시대 때 유일하게 일정(왜정)하고 싸운, 독립정신이 그대로 박힌 학교였는데.”

일산리 보성학교 출신으로 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김병희 박사는 지난 2007년 울산발전연구원 부설 울산학연구센터가 발간한 <일제­1960년대 울산의 교육>에서 당시 보성학교와 교원들에 대해 이와 같이 구술했다.
 

▲ 1929년 3월 일산 보성학교 제5회 졸업생들과 교사들의 사진. 맨 앞줄에는 교장이었던 성세빈 선생과 성세륭 선생 등이 앉아있다.
 

◇학교터엔 성세빈 선생 송덕비만 덩그러니

울산 동구 일산동 160 일대에 위치했던 보성학교는 1970년대 멸실돼 현재 학교가 있던 터에 성세빈 선생 송덕비만 덩그러니 남은 상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찾은 보성학교 터에는 조화 꽃바구니 몇 개만이 송덕비 앞에 놓여있었다. 동구에서 구청 차원의 대대적인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이날 펼쳐졌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울산 항일운동의 산실로 불렸던 보성학교 터를 찾는 이는 없었다.

일산리에 세워진 사립 보성학교의 역사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1월12~13일자 대한매일신보에 학교 운영을 위한 기금모금 광고와 함께 의연금 모금에 참가한 명단이 실려 있는 것을 바탕으로 보성학교는 1909년 처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의연금 모금에는 92명이 참가해 847원60전의 의연금을 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사립 보성학교가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 운영됐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내무부 학무국이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조선에서 운영된 사립학교 상황을 조사·정리한 통계자료인 ‘조선인교육사립학교통계요람’에는 일산리 보성학교에 대한 자료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보성학교는 1912년 전에 모종의 이유로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민족교육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많은 사립학교가 폐교되거나 공립으로 전환되는 등 수난을 면치 못했다.
 

▲ 1924년 작성된 보성학교 졸업대장. 현재 울산광역시 강북교육지원청이 소장하고 있다.

◇민족자본이 설립·운영…항일운동 구심점

보성학교가 다시 부활한 것은 그로부터 10년뒤인 1922년 5월이다. 1909년 당시 보성학교 출연에 앞장서 의연금을 가장 많이 냈던 성수원의 장남 성세빈 선생이 아버지에 이어 한번 더 재산을 헌납해 일산리에 학교를 세웠다. 주간 강습회를 통해 100여명의 아이들은 물론 야학 학생도 보성학교로 몰려들었다.

보성학교는 1922년부터 1945년 폐교될 때까지 총 21회에 걸쳐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특히 보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원 중에는 서진문(건국훈장 애족장)과 이효정(건국훈장 포장), 박학규, 김천해 선생 등 울산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펼쳤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1920년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교육계몽 및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청년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울산에서도 울산청년회, 동면청년회, 방어진청년회 등 청년회가 여럿 조직됐는데 동면청년회와 울산청년동맹 동면지부, 적호소년회, 신간회 울산지회 동면지부 사무실이 전부 보성학교 내에 위치해 있었다.

교원들 대부분이 청년회와 신간회 소속이었고 학생들도 어렸을 때부터 적호소년회 등에 참여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한마디로 보성학교는 학교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보성학교가 동면 일대의 조선인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면서 일제의 폐교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일제는 사립학교규칙 개정과 동면지역 유일 동면공보교의 학생수가 부족하단 이유로 1929년 2월18일 보성학교 폐쇄명령을 내렸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 당시 교장이었던 성세빈 선생과 사상이 불온하다고 지목됐던 교직원들이 전부 물러나면서 학교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일제는 보성학교를 매년 등록을 갱신해야 되는 교습소(학원)로 격을 낮췄다.

이런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보성학교는 울산지역에서 유일하게 1945년까지 지속된 사립학교였다.
 

▲ 현재 보성학교 터에는 성세빈 선생 송덕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최하 등급 독립운동사적지로만 등록

이같은 역사를 지닌 보성학교 터는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기념관이 지난 2010년 발간한 <부산·울산·경남: 독립운동사적지>에 독립운동사적지로도 등록돼 있지만 정작 현충시설로는 지정돼 있지 않다. 울산 보훈지청 관계자는 “보성학교에 대한 현충시설 지정 신청은 아직까지 들어온 바 없다. 또 지역에서 관련 목소리는 커지고 있지만 보성학교는 사적지 조사를 통해 C등급 밖에 받지 못한 상태다”고 설명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일산리 보성학교 터는 지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국내 항일독립운동 및 국가수호 사적지 조사 결과 최하 등급인 C등급을 받았다. 울산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민족사학이라는 상징성은 물론, 신간회와 같은 각종 사회단체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최하 등급을 받은 것이다.

장세동 동구문화원 동구지역사연구소장은 “보성학교는 당시 동면 지역 조선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고 보성학교 자체가 항일·사회운동의 산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성세빈 선생·보성학교 재평가 이뤄져야

보성학교의 낮은 등급과 현충시설 미지정 이유에 대해 보훈지청 관계자는 “서진문 선생이나 이효정 선생 등이 보성학교 출신 교원으로 서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성학교가 등급이 낮은 건 교장인 성세빈 선생이 미서훈이란 점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결국 설립자이자 교장이었던 성세빈 선생의 미서훈 역시 학교의 현충시설 지정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세빈 선생과 보성학교에 대한 제대로 된 재평가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이유다.

배문석 보성학교 복원 시민모임 기획실장은 “보성학교 터는 이미 보훈처로부터 항일유적공간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현충시설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현충시설 중 건물이 멸실된 터를 국가현충시설로 지정한 사례가 이미 여러 건 있는만큼, 울산보훈지청과 지자체가 먼저 나서 지역의 항일유적공간을 발굴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주기자 khj11@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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