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에서 석남사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울산자동차면허시험장이 보인다. 여기서 100m 정도를 더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향산초등학교와 학교 앞 왕복 1차선 도로를 지나는 육교가 나온다. 인근에 육교는 이곳 한 곳 뿐이다. 육교 오른쪽의 나즈막한 자약봉 아래 자리한 동네가 울주군 상북면 향산리 향산마을. 400여년 전부터 진주강씨가 자리를 잡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뒷산인 자약봉에서 약 향기가 그윽하게 풍긴다고 해서 향산리(香山里)로 불리는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능산마을의 능산리와 합쳐졌다.

 향산리는 달리 효자리(孝子里)라고도 불린다. 효자가 났기 때문이다. 향산마을 입구는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에는 향산마을 입석이, 다른 한 곳에는 효자리 입석과 바로 옆에 효열비(孝烈碑)가 세워져 있다. 효자리 입석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명치 43년) 강상황(울산 입향조 강이인의 9세손)의 효행을 기념해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자연석에 "효자리"라는 글자를 세겨둔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로 부터 받은 효열상 상금은 10원.

 이후 99년 향산마을 진주강씨 후손들은 효자리 입석 옆에 효열비를 세웠다. 효자비가 아니라 효열비(효자+열녀)를 세운 것은 강상황의 효행과 더불어 아내 최씨가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섬긴 것을 기념한 것이다.

 향산문중 회장 강장회(75)옹은 "괴질에 걸린 어른을 낫게 하려고 의원을 찾았는데 의원이 인육(사람고기)을 먹으면 낫는다고 해서 상황 어른이 자신의 허벅다리를 제 손으로 베내 국을 끓여줬습니다. 그래도 어른의 병이 낫지를 않아 다시 의원을 찾았는데 인육이 적다고 해서 다른 한쪽 허벅다리를 베냈답니다"며 상황의 효행을 설명했다.

 문중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강영모(52)씨는 "최씨 부인은 남편 상황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 먹여 훗날 열녀로 선정됐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효자·효부가 난 마을을 대변하듯 향산마을에는 일흔살 된 며느리 최차선 할머니가 아흔살 먹은 시어머니 박화순 할머니를 뒷바라지하며 살고 있다. 강장회옹은 "강씨 집안에 시집 온 최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을 잃고 딸만 하나 낳았는데 나이 70이 되도록 시어머니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평생가도 인상한번 찌푸리지 않고 대문 밖으로 고함소리 한번 나온 적 없을 정도로 사이좋게 지냅니다"며 "신혼여행가서도 이혼하는 세태에 동네에서 얼마나 큰 미담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고 말했다.

 강영모씨는 최근 문중에서 보관중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울산의 입향조인 강이인(姜里仁·1580~1606)에게 보낸 자필 답신-고서 간찰첩"으로 옛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TV프로그램에 출현, 감정위원 감정가로 1천만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강이인의 후손과 이항복의 후손이 주고받은 편지는 감정가 50만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향산마을 강씨문중에서 이 편지를 보관해 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강이인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왜적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자로 "너의 머리"라고 답했다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8년동안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오성과 한음"으로 널리 알려진 오성인 백사 이항복은 일본으로 가는 사신에게 "나의 문하생 희주의 아들 이인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살아있거든 본국으로 데려오라"는 서신을 줬다. 그 사신이 일본에 가서 이인을 찾아 조선으로 데려왔다.

 청년 이인이 귀국길에 처음 조국땅을 밟은 곳이 지금의 학성공원 앞 포구였다. 마침 강씨 성의 병마절도사가 이인을 맞아 한양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인은 가족이 없는 한양으로 가지않고 훈련원정 고처겸(제주고씨)의 딸과 혼인해 아들 계현을 낳고 27세에 병사했다.

 이어 아들 계현이 향산리의 기계유씨 집안 딸과 혼인해 어머니 고씨와 함께 향산리로 들어와 살면서 향산마을에 진주강씨가 번창하게 된다. 따라서 울산의 입향조는 강이인이고, 향산마을의 입향조는 이인의 아들 계현이 된다. 초기에는 기계유씨와 진주강씨가 한 동네에 살았으나 차츰차츰 기계유씨가 떠나고 진주강씨만 마을에 남아 모두 220호를 번창시켰다. 약 40여년 전부터는 타성이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해 지금은 전체 40가구 중 22가구가 강씨다.

 법정리명으로는 향산리에 속하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능산리인 능산마을에도 진주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나 향산마을과 능산마을의 가장 가까운 촌수가 36촌이다. 능산마을은 향산마을보다 약 10년 앞서 강이성(姜以成)이 들어오면서 진주강씨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향산마을 출신으로는 강인수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강대철 송원산업 이사, 강걸수 울산시 문화체육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강명수씨가 있다. 또 강영선 전 울산상호신용금고 이사장, 강방회 전 부산우체국장, 강인수 전 경남도의원, 강석회 전 한국전력공사 경남지점 관리실장, 강성덕 전 대전철도청 국장도 향산마을에서 자랐다. 또 강대윤, 강대호씨가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강대관씨가 고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박은정기자 musou@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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