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10. 대곡천에 핀 불교문화(하)

▲ 거북이 모양의 반구산. 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반고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황룡사서 승려된 후 반고사서 사미승 수행
‘삼국유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
영축산(現 문수산) 혁목암의 낭지와 교류
‘초장관문’‘안신사심론’등 왕성하게 저술
울산지역 불교문화 확산에 큰 영향 끼쳐
이후 분황사·오어사 기거 불교대중화 노력
울산과 인근 지역에 관련 설화·전설 다수

원효(元曉 617~686) 하면 울산과는 동떨어진 먼 옛날의 고승을 떠올리지만 실은 원효의 본격적인 삶은 울산 반고사에서 시작됐다. 원효는 617년(신라 진평왕 39년) 경상북도 압량군 불지촌(경산군 압량면 신월동) 북쪽의 밤나무골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젊은 날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는 20세 쯤에 출가했다고도 하고 열살 미만의 나이에 출가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원효는 황룡사에서 승려가 됐고 사미승(행자생활을 마치고 열 가지 계율을 받은 남자 승려) 시절 울산의 대곡천 반고사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반구대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세워진 반고사에서 원효는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원효의 삶은 이 때부터 <삼국유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 원효가 출가 수행자를 위하여 지은 <발심수행장>.

울산대곡박물관 신형석 관장은 “원효대사의 활동 무대에서 울산지역을 빼놓을 수 없다. 원효는 울산 불교문화 확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반고사는 그런 면에서 울산지역 불교사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자리한 반고사 터는 기암절경이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다. 이 반고사 터에는 석조불상 1구와 탑신(塔身)이 있었으나, 1965년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부산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불상은 높이가 109㎝이며 머리 일부와 두 손이 없는 상태다. 이 곳이 반고사 터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그냥 행정구역 명칭을 붙여 ‘대곡리사지’라 불러왔다.

<울산읍지>(1934) 불우조에는 ‘반고사는 반구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고사가 언제 폐사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이 절터에 반고서원(반구서원)이 건립됐다.

▲ 반고사지에 있던 탑재(塔材). 현재는 부산대학교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다.

원효는 나이 31세(647년, 선덕여왕 원년) 때 이 반고사에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 삼국유사 권5 피은(避隱)8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조에 보면 원효는 반고사에 있을 때 늘 낭지를 가서 뵈었으며, 낭지는 원효에게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게 했다.

낭지(朗智)는 원효와 <추동기>의 저자인 지통(智通 655~?)의 스승이었다. 당시 낭지는 울산 무거동 영축(취)산(문수산)에 있던 혁목암(赫木菴)에 머물러 있으면서 수행과 교화활동을 하고 있었다. 혁목암은 낭지가 영축산의 혁목(赫木, 일종의 나무)을 중국 청량산에 가지고 갔던 것에서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울산 영축산의 혁목암은 과거불인 가섭불 시대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 곳 영축산은 변재천녀(辯才天女)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영축산은 신라 법화신앙의 중심지였으며 낭지는 ‘늘 법화경을 외웠으므로 신통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서쪽 골짜기의 사미(沙彌)는 머리를 조아려 예(禮)를 드리니
동쪽 봉우리의 상덕(上德) 고암(高巖) 앞에
가는 티끌을 불어 영취(축)산에 보태고
가는 물방울을 날려 용연(龍淵)에 던집니다.
*반고사는 영축사 서북쪽에 있으므로 서쪽 골짜기의 사미는 원효 자신을 이른다

원효는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 저술을 마치고 은사(隱士) 문선(文善)을 시켜 글을 보내면서 그 끝에 자신을 낮추고 낭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시구를 적었다. 원효 나이 31세 일이었다.

3년 뒤 원효는 나이 34세 때(650년) 반고사를 떠나 의상과 함께 현장 삼장과 자은사 문중을 흠모하여 당나라로 가기 위해 고구려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으나 요동 땅에서 고구려군에 발각돼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이후 원효는 45세에 의상과 함께 제2차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 당주계 근처에서 땅막(토굴)과 무덤의 차별이 아뢰야식(一心)의 차별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유학의 무의미함을 확인한 뒤 신라로 돌아온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반고사를 떠난 뒤 34세 때 당나라 유학에 실패하고 곧바로 바닷길로 가다가 직산에서 해골물을 먹었다는 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어젯밤 잠자리 땅막(토굴)이라 편안했는데, 오늘밤은 귀신의 집에 의탁하니 매우 뒤숭숭하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현상이 없는데 어디서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원효는 그 후 주로 분황사에 있으면서 불교 대중화를 위한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일정한 스승도 없었지만 무덤에서의 결정적 계기를 통해 오직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 원효는 포항의 오어사(吾漁寺)에 머무르며 보살행을 하는 혜공(惠空)과 교유하면서 여러 공론에 관해 토론을 벌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어사는 혜공(惠空)·원효(元曉)·자장(慈藏)·의상(義湘) 등의 승려가 기거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효와 혜공이 물고기를 잡아먹고 똥을 누자 물고기가 살아 유유히 헤엄쳐나갔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원효산, 화엄벌, 집북재, 천성산, 내원암 등 울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원효 이야기는 울산 전역에 남아 있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수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껴도 보전하지 못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내일 살기 기약 없고 오늘은 이미 저녁,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리라.”

원효가 출가 수행자를 위하여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의 일부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사진출처=울산대곡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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