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련(최명영作)-봄이다. 꽃들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매화, 수선화, 진달래, 목련… 매년 같은 꽃인데도 언제나 처음 보듯 반갑다. 봄도 꽃도 기다림이자 설렘이다.

마른 잎을 걷어내자 푸르스름한 수선화 촉이 올라와 있다. 아직 겨울 빛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도 봄을 기다리는 것은 나뿐이 아닌가보다. 꼿꼿하게 올라오는 잎이 반가워 손가락으로 만져본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에 걷었던 낙엽을 다시 덮는다. 따스한 햇살이 마당가득 내려앉아 있다. 봄기운이다.

하우스 문을 활짝 열고 연탄을 간다. 하우스에는 다육이들과 꽃들이 자라고 있다. 기온에 민감한 식물들이라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하우스 안에는 봄이 한발 앞서 와 있지만 밖의 봄은 더디게만 느껴진다.

호수를 끌어다 화초에 물을 준다. 물을 주면서 묻는다. 밤새 안녕했냐고. 여전히 대답은 없다.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묻는 것은 오랜 습관으로 전해진 어른들의 안부처럼 일상적이다. 물을 주고 나면 잎에 남아있는 물기를 제거한다.

관엽식물이나 꽃은 일부러 물기를 제거하지 않아도 되지만 다육식물들은 잎에 얹힌 물방울을 제거해야 얼룩이 지지 않는다. 물을 주는 일보다 물방울 제거하는 일이 더 오래 걸린다. 행여 스포이트 끝이 분이 가득한 잎을 스치면 생채기가 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화훼단지에서 사온 수선화에도 물을 준다. 꽃대가 웅숭그리고 있는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조금 이른 성장에 마음이 쓰인다. 마당에 심어놓은 것들은 이제야 촉을 올리는데 온실에서 자란 수선화는 시간을 앞서간다. 햇살을 피해 그늘로 옮겨놓는다. 아직은 봄꽃 찾는 손님이 찾아올 때가 아니니 꽃을 피우지 말라고 은근한 압력행사를 한다.

수선화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다. 어릴 적 살던 집 앞마당에 수선화가 가득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등교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나는 수선화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을 앞 저수지수면에 물안개가 가득한 날이면 수선화 꽃잎마다 보석 같은 이슬이 대롱거렸다. 이슬은 꽃잎에 동화되어 영롱한 노란빛을 띄었다. 그것이 신기해 손가락에 살며시 얹어 놓으면 노란빛은 사라지고 맑은 물만 또르르 손가락에서 미끄러졌다. 봄이 되면 설레는 이유, 수선화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알뿌리 식물들에 물을 조금씩만 준다. 햇살이 들지 않는 곳에 옮겨놓고 더디 피기를 부탁한다. 겨우내 꽃이 피기를 기다리던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학교에 늦는다고 타박하는 언니를 미워할 만큼 수선화 곁을 떠나지 않았던 순수함은 온데간데없다.

작은 화원을 운영하다 보니 이런 나의 모습이 낯설고 생경하다. 꽃이 문제가 아니란 것쯤은 안다. 너무 이른 시기에 가져다 놓은 내 잘못이다. 뭐든 때가 있는 법인데 어느새 욕심이 생기고 있다. 그토록 예뻐하던 수선화를 값으로 매기고 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부화가 난다.

밤새 추위에 떨었을 다른 꽃들도 살핀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호주매화가 딱 한 송이 꽃을 피웠다.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핸드폰을 가져와 사진을 찍는다. 자세히 보니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봉우리들도 꿈틀거리고 있다. 이름이 예쁜 설유화가 부름켜를 키우는 옆에 천리향이 꽃을 피우기 직전이다.

꽃은 활짝 피었을 때도 예쁘지만 피기 전 앙다문 잎을 보면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향긋한 꽃향기가 바람결에 묻어있다. 누가 또 꽃대를 올리는지 살핀다. 내내 하우스에 있다가 어제 내 놓은 히야신스다. 진분홍 꽃이 예쁘기도 하다. 밖에 놓아도 상관없는 아이를 하우스 안에 넣어두었더니 꽃대가 빨리 올라왔다. 이것도 내 불찰이다.

하우스를 한 바퀴 돌고 마당을 살핀다. 작년에 심어놓았던 알뿌리 식물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번에는 빨리 크라고,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을 한다. 돈을 주고 사면 꽃이고 지천에 피면 잡초라는 말이 떠오른다. 언제부터 꽃을 보고 가격을 매겼는지, 언제부터 인기 있는 꽃들에 집착했는지, 자꾸만 드러내는 욕심을 어떻게 다스려야할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계절은 재촉한다고 빨리 오지 않는다. 꽃도 마찬가지다.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뭐든 때가 되어야 영그는 법이라고 했던 어머니 말씀을 잊고 살아온 것 같다. 학교 가는 것조차 잊고 수선화 꽃을 바라보던 나는 없고 어찌하면 조금이라도 더 팔까만 집중하고 있는 현실적인 내가 부끄럽다.

하우스 안을 한 바퀴 다시 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다육식물 꽃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들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조급하게 꽃잎을 열지도 않는다. 햇살이 가장 강할 때를 기다린다. 다육들의 기다림과 내 기다림의 대상이 다르다. 어쩌다가 꽃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는지 세월 탓이라고 하기에 나는 요즘 너무 냉정하다. 어제 미뤄놓았던 분갈이를 한다. 화분과 어울리게 심고 이름표를 꽂는다. 이름 아래 숫자 적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봄을 기다린다.

▲ 노옥심씨

■노옥심씨는
·2009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울산문인협회 회원

 

 

 

 

 

▲ 최명영씨

■최명영씨는
·개인전 및 부스전 29회(울산·서울·뉴욕·파리 등)
·중·남부구상회화제(포항·울산문예회관)
·동북아시아 미술교류전(부산·중국)
·구상일번지 출품(포항 포스코갤러리)
·현대구상미술의 새로운비전 출품(부산)
·한국미협 서양화2분과 이사 ·경남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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