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19일 낮 기온이 20℃까지 치솟았다. 꽃은 일조량과 기온이 맞으면 어김없이 핀다.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작천정 벚꽃터널 나무들이 죽은 듯 서 있지만 열흘 후면 그 가지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오는 29일 작천정 벚꽃터널에 축제가 시작되면 비로소 잔인한 4월이 서막을 연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우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으니,/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었으나/ 마른 뿌리로 작은 생명을 남겨 주었네… ‘황무지’(T.S.엘리엇)

필자의 마당에는 제법 키가 큰 라일락이 있다. 아직 꽃봉오리가 덜 열렸지만 한 며칠 지나면 마당은 온통 라일락 향기로 뒤덮힐 것이다. 춘분(春分)인 오는 21일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다. 이날을 기해 밤은 짧아지고 낮은 갈수록 길어진다. 낮이 길어진다는 것은 일조량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고 그 4월의 고비를 넘어서면 꽃이란 꽃은 죄다 만개한다. 식물뿐만 아니라 천지간의 생명 있는 숫컷과 암컷들은 모두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는다.

필자 마당을 기어 다니는 땅 꽃들에까지 벌들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 만물의 조화가 이렇게 신비할 수 없다. T.S.엘리엇(Eliot)은 시 ‘황무지’에서 전후(戰後) 서구의 잔인한 4월을 ‘반어법’으로 말하고 있지만 거꾸면 보면 다시 다가올 포근한 겨울을 ‘직설화법’으로 설명해 준다. 인생은 죽음에서 피어나고 고통의 바다에서 구원받기를 반복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지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낼만큼 한 낮 기온이 치솟는 시기다.

▲ 춘분에는 밭을 갈고 담을 고친다.

춘분은 ‘봄을 나누는 날’이다. 황도(태양의 궤도)와 적도가 만나면서 하루의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이 되는 지점을 춘분점(春分點)이라고 말한다. 춘분점이 지나면 기온이 급속도로 올라가면서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고 서리가 그친다. 텃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담을 고치고 들나물을 캐어먹는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2월(음력)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는 말은 이날을 지나면서 사그러진다.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으니(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전한(前漢)시대 미인 왕소군(王昭君)의 불운을 슬프게 여긴 당나라 동방규가 읊었다. 봄은 왔지만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네…. 북방 흉노족에 시집가야 했던 왕소군의 운명은 가혹했지만 오히려 그 운명을 극복하면서 그의 무덤(靑塚)에는 사시사철 늘푸른 봄풀이 자랐다. 모레는 겨울과 여름, 밤과 낮을 가르는 계절의 역설(逆說) ‘춘분’이다. 이재명 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