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오영수도 예찬한 맛

뿌리째 초장 찍어 ‘아그작’

▲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들 선바위미나리 재배단지.

경상일보 자료사진

미나리가 잘 자라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바로 맑고 풍부한 수량이다. 태화강 상류인 언양은 미나리를 재배하는데 최적이었다.

언양미나리의 기록은 1919년 <언양읍지>에서 찾을수 있다. ‘언양미나리는 고을 동쪽마을 대밭 길에서 나는데 질펄 밑에 나는 그 미나리는 파랗고 보기도 좋다.’ 1930년 동아일보는 언양미나리를 명물로 소개하고, 1934년 <울산읍지>에서는 또다시 ‘청근(靑芹), 즉 미나리가 난다’고 했다.

1925년 12월 <개벽>에는 임원근의 여행기가 실렸는데, 거기서도 언양의 미나리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언양 명산 미나리의 특미는 족히 도회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조소할 만큼(중략) 그 부근 주민들은 언양을 말할 때는 반드시 미나리를 연상하고 미나리를 생각할 때는 동삼설 중에 오직 그 찍찍한 신조미를 맛볼 수 있는 것을 크게 자랑한다.’

울산 출신이자 한국의 대표적 단편소설가인 오영수도 언양미나리를 글감으로 사용했다. 그의 글 ‘고향에 있을 무렵’(1974)은 미나리에 대한 예찬이 이어진다. ‘미나리면 어디 없이 다 같다는 것은 아직 미나리를 잘 모르는, 이를테면 창녀와 선녀를 혼동하는 소매에 불과하다. 내 고장은 소원이 가까워 물이 좋다. 게다가 땅이 사질이라 주야무시로 흐르는 물에서 거의 자생적이다시피 자란 내 고장 미나리의 그 독특한 감미와 향취는 딴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른 봄 두세잎쯤 돋았을 때 뿌리째 뽑아 깨끗이 씻어서 초고추장에 날로 먹는 것이 진미다.’

하지만 이후 언양미나리는 급격하게 생산량이 급감했다. 재배면적이 줄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안타깝게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 역시 오영수였다. 작품 ‘실향’(1976)에는 언양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낀 섭섭함이 묻어난다. ‘왜 저 밤밭등 있잖아.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소를 몰고 올라가서 잔디밭에 딩굴면서 씨름도 하고 코서리며 밀서리며 해 먹고 놀던 놀이터 말야.… 새치나무거리 미나리강도 붕덤이 멱터도 거의 다 메워졌고…. 옛날 고향이 아니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양미나리를 생산하는 상인들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들 역시 예전만 못한 언양미나리의 입지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생산, 수확, 판매까지 한 지역에서 이뤄져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싱싱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홍영진 기자·<울산의음식>(2018·울발연울산학연구센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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