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장군의 ‘진중음’9-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35×68)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뜻을 알아준다.’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이 칼에 새긴 검명으로도 유명하다. 권두호作

아들과 나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을까?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된 아들의 이삿짐을 챙기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마음이 엉뚱한 곳에 있으니 이삿짐 싸는 일도 지지부진 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수첩을 찾아 생각나는 대로 챙겨갈 물건들을 메모했다. 그러고 나서 옷부터 종이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아무래도 옷부터 정리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은 자주 세수를 했다. 컴퓨터의 선을 뽑을 때도, 책꽂이의 책과 문제집을 정리할 때도 아들은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눈물이 쏟아질 때는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며 밖에서 한참을 있다 오기도 했다. 아들의 눈물 속에는 자식을 객지로 떠나보내고 쓸쓸해 할 부모에 대한 미안함과 익숙한 곳을 떠나 혼자 살아야 하는 두려움이 담겼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홀로 시작하는 생활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살아야 하는 고달픈 마음이 앞질러 자리했을지도 모른다.

전자오락에 빠지거나 컴퓨터 게임에 빠져 온 집안 사람들의 걱정거리였지만 싹싹하고 정이 많은 아이라 자잘한 심부름은 도맡아 했다. ‘쌀 세 조롱박만 씻어 놔라’ ‘빨래 걷어 놔라’ ‘베란다 블라인드 내려라’ ‘시장바구니 무거우니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라’는 말에 뒷말을 달지 않았었다.

아들의 눈물 앞에 꼿꼿한 자세로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낯선 용달차 운전수 아저씨 옆에 웅크리고 앉은 아들을 보니 눈앞이 안개에 싸인 듯 뿌예진다.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눈에 익은 농과 책상, 침대가 용달차에 밧줄로 단단히 둘러싸인 채 내 앞을 지나고 있었다. 농과 책상은 아들이 군에 입대하게 되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함께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은 이제 내 품을 떠나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용달차에 실린 물건들은 덜컹거리는 길에서도 흠집을 내지 않고, 바람을 잘 견뎌내라고 밧줄로 잘 묶어놓았다. 아들에게도 그런 밧줄이 필요할 것이다. 이젠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스스로 자신을 단단하게 묶는 방법도 찾아내야 하리라. 가끔씩 흔들리기는 하겠지만 그러면서 혼자 강을 건너는 법을 배울 때가 된 것이다. 스무 살, 그러기에 충분한 나이다.

아들의 유치원 졸업 사진첩을 뒤적이며 삼십 대 중반의 시절로 돌아가 한참을 거닐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사진첩 속의 사진 중에 오른손으로 나무를 잡고 앞니를 다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앞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아들이 가장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문니 한 개가 빠진 채 웃는 모습에 나도 슬그머니 따라 웃었다.

아들의 물건이 빠져나간 뒤,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방안에서 사진첩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서둘러 방을 치우고 나니, 가슴에 가득하던 바람소리가 조금은 잦아든다. 그제야 초겨울 거실에 들여다 놓은 군자란이 의젓한 자세로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언제나 우리 집의 봄을 알리는 꽃! 이십여 년 전, 남편의 지인들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았으니 딸이나 아들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지냈다. 가끔씩 남편이나 자식들 때문에 삶의 회의가 생길 때면 군자란 잎을 닦으며 마음을 달랬다.

오랜 세월 군자란을 키우며 지켜봤던 터라 나는 아들이 군자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잎이 얇은 화초들은 며칠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바싹 말라 죽어버린다. 그러나 군자란은 무심히 두어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언제나 믿음직하다. 꽃대가 잎 사이로 슬며시 얼굴을 내미는 모습은 경건하고 근엄하다.

아들의 얼굴에서도 군자란의 의젓한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황의 꽃이 차례차례 질서 있게 피는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아들도 군자란처럼 정갈한 삶의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느긋한 자세로 서두르는 법 없이 제 속도로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보면 군자란이란 이름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깨닫게 된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찻주전자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손잡이를 돌려 불을 켰다. 파란 불꽃을 아주 낮게 해놓고 유리문을 통해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 앉아 군자란을 본다. 군자란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윽해진다. 지그시 눈을 감고 군자란을 보고 있으니 집 떠난 아들의 분신인 양 대견하게 여겨진다. 5일이나 10일 쯤 지나면 군자란은 주황의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몇 년 쯤 뒤면 아들도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리라. (이 작품은 오래 전에 썼던 작품임을 밝혀둡니다.)

▲ 최봄(최미애)씨

■최봄(최미애)씨는
·경남 마산 출생.
·2006년 울산문학 신인상, 2007년 아동문예 문학상, 샘터상, 천강문학상, 울산문학 작품상 받음
·2018년 푸른동시놀이터 추천완료, 동시작가로 등단
·동화책 <1,2,3,4,선생> <앞치마를 입은 아빠> <도서관으로 간 씨앗> 펴냄

 

 

 

▲ 권두호씨

■권두호씨는
·40여년 교직생활, 교장으로 퇴직
·홍조근정 훈장·울산교육감상 수상
·대한민국·경남·울산·백제서예대전 초대작가·심사위원
·한국서예협회 이사 울산서예협회 회장 역임
·개인전 2회
·춘강서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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