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문화사업지원팀 차장

14~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끈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문화예술, 정치, 경제 등 다방면으로 유럽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문화예술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컸다. 후발주자이긴 했으나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많은 도시들 또한 문화도시를 표방하며 문화예술 부흥에 열성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유독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만이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르네상스를 이끈 선두주자이기 때문이라서 그럴까?

14세기 피렌체는 흑사병의 직격탄을 맞는다. 10만 명을 바라보던 인구는 4만 명으로 줄었고, 사회 지도층은 참사를 피해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에게 피렌체란 가족이 있는 곳이자 곧 생활터전이었기에 목숨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외에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또 있었다. 바로 금융업 종사자들이었다. 흑사병이 창궐해도 경제질서는 유지되어야 했다. 특히 교황청, 귀족 등과 같은 큰 손들을 주로 상대했던 금융업자들에겐 고객이 전부였기 때문에 결코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것이다.

흑사병의 위기가 지나가고 피렌체에는 살아남은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체제가 더욱 굳건해진다. 그리고 시민들과 함께 흑사병을 이겨낸 메디치 가문은 구차했던 기득권을 몰아내고 피렌체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다. 본격적인 메디치 가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들의 출신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상인계급이었다는 점과 그 중에서도 유독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금융업에 종사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시민들의 여론과 정통성 시비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배척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민 여론, 국제 정세 등 대내외 여러 분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 시도 중 하나로 문화예술 진흥 정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의문은 있다. 왜 유독 피렌체의 문화예술 진흥정책이 특별했냐는 점이다.

그 해답은 메디치 가문이 추구한 가치에 있다. 그들은 철저히 ‘사람 중심의 문화예술 진흥정책’을 펼쳤다. 적극적인 시민의견 수렴은 물론 예술가에 대한 존중 또한 각별했다. 일례로 기베르티에게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청동문을 무려 47년간에 걸쳐 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인내심만 보아도 예술가를 도구와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 그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기베르티뿐인가? 도나텔로, 마사초,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등 메디치 가문이 꽃피워낸 예술가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 또한 한계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출신성분의 콤플렉스로 인한 과도한 권력 지향이 문제가 되어 가문은 몰락을 맞게 되고, 전 유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메디치 가문을 기억하는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이 600년 전 자그마한 유럽의 한 도시에서 추구했던 그 가치, 바로 ‘사람에 대한 존중’이 전 유럽에 미친 영향력과 변화를 지금 우리가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현재 우리에게 묻고 있다. 과연 우리의 문화정책에 ‘사람’은 존재하며, 또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문화사업지원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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