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도민 울산에 둥지

생업으로 물질하며 가족위해 헌신

산업화·고령으로 설자리 줄어들어

해녀 통해 울산사람들 생활상 채록

▲ 미역을 건져올리는 울산 북구 해녀들.
최근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 채널에 눈길이 멈췄다. 예능프로그램에서는 농어촌을 지키는 청년 농부와 어부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우리 시골마을을 지키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거기에 울산에 살고있는 청년 해남이 등장했다. 화면 속에서 해남은 바다 밥상 차리기, 해녀복 입기, 물질 도전 등 울산 바닷가 삶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줬다.

자연스럽게 몇년 전 울산 해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던 작업이 떠올랐다. 산업도시 반세기 울산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구술 생애사(oral life history)를 울산학연구센터의 연차과제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 첫 해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앞두었던 당시 (제주)해녀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울산 해녀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구술사는 말 그대로 연구자가 사람들로부터 사건과 관계된 구술을 수집하여 정리하는 것이다.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여성학, 민속학 등 역사와 사람이 있는 분야에서 주로 다뤄졌으며, 최근에는 그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울산 해녀들의 구술 생애사를 인터뷰 하려 하자 대부분의 반응은 ‘울산에도 해녀가 있어요?’였다. 어쩌면 산업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한 울산에서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전까지 울산에서 해녀 이야기를 다룬 기사는 있었지만, 그 외의 방법으로 해녀를 언급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구술사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료로 남길 수 있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 이면의 증언을 바탕으로 역사의 한 부분을 메워나갈 수 있다. 개인들의 생애 경험이 기억에서 이야기가 되고, 기록되어 역사가 된다. 지역사회에서 주민들은 구술사를 통해서 자신의 역사를 쓸 수도 있다.

울산은 예로부터 바다가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으며,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해녀들이 있었다. 울산 출신인 그들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적부터 바다는 그들의 놀이터였다. 조선시대 <경상도울산부호적대장>에는 출륙 제주도민을 일컫는 ‘두모악’이 집단 거주지를 이루어 생활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상당수의 여성이 포함된 것으로 볼 때 제주 해녀들이 울산으로 건너와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일생, 울산 해녀 이야기>(2015)는 울산 북구, 동구, 울주군 바닷가에 거주하는 해녀 10명을 만나 그들의 생애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해녀가 되었고, 해녀가 된 이후 구체적인 경험은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가족 속에서 그들의 위치와 역할, 그들이 울산의 변화를 어떻게 경험하고 바라보았는지를 들었다.

‘저녁에 먹을 쌀이 없어도 다음 날 아침 바다에 가면 돈이 생기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라는 것이 해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들에게 물질은 아이들 키우며 먹고 살 수 있었던 생업이었다. 삶이 힘들어 가끔은 물질이 망설여지고, 물에서 나올 때면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바다에 가면 자연스럽게 열심히 하게 된다. 바다는 항상 공평하게 준다고 믿는다. 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지만, 내일은 많이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다른 해녀가 훑고 지나간 자리지만, 자신이 채취할 물건은 또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제 울산의 해녀들도 대부분 고령이다. 산업단지가 늘어나고, 바다가 개발되고, 양식하는 바다가 많아지면서 점차 해녀들의 작업장은 줄어들고 있다. 해녀들은 산업화 이전과 이후 울산의 변화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 이들의 생애사는 중화학 중심의 남성 중심 울산 노동자의 삶과 더불어 울산의 생생한 현대사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살아 온 울산의 여성사이기도 하다. 이경희 울발연 울산학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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