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사람만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거운 돌덩이에도 사연이 구구하다. 국보 제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떠돌다가 77년 만에 돌아왔다. 아쉬운 것은 둔철산 기슭의 제 자리가 아니다. 범학리가 가까운 국립진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1941년 일본인 골동품상이 대구로 빼 돌렸다가 다시 총독부 박물관으로 그리고 경복궁 뜰에 한참 외로이 서 있었다. 경복궁 정비공사로 해체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또 20여 년을 보내다 지난해 가을 이곳으로 왔다. 시민들의 성대한 환영식도 있었다. 탑이 있는 곳은 진주성의 중심부이다. 때문에 뭇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대의 격전지로 많은 장수와 의병장들이 목숨을 바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는 사람들만 휘둘려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다. 일본의 계략으로 엄청난 수의 문화재가 도난당하고 밀반출되었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은 탑에게 가만히 위로의 말을 건넨다. 상층 기단에 새겨진 신장상과 일층 몸돌에 새겨진 네 분의 보살상을 한참 들여다본다. 오랜 고난을 겪었어도 연화좌위의 보살은 그 표정이 온후하여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갑옷을 입은 8구의 신장상은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9세기 말, 신라의 국력은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지만 지방에는 이렇듯 뛰어난 석공이 있어 불국토를 만들어 갔다.

▲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진주성 일대는 사철 우리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가을이면 백일장과 사생대회가 열렸고 촉석루 마루에서 진주검무도 배웠다. 박물관 옆 호국사는 어머니에겐 일상의 기도처였다. 고향을 떠나 산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내가 떠난 그 자리에 높이 4.8m의 아담한 삼층석탑이 돌아와 듬직하고 의젓한 자세로 서 있다.

푸른 잎을 흩날리는 가시나무 그림자가 탑을 포근히 감싸 안은 사진을 꾹 눌러 타국살이를 하는 친구에게 전송한다. 단발머리 찰랑이며 둘이 손잡고 오르던 그곳이라고.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난 그녀의 귀향을 바라는 마음도 함께 보낸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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