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원망이 섞인 아픔은
시간 지난다고 치유되지 않아
진정한 사과 통한 용서만이 해결

▲ 김상곤 독일 만하임대학 초빙 연구원 전 울산시 감사관

타인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슬픔이 가져오는 고통의 깊이까지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 슬픔의 원인이 자식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일 경우 가까운 혈육일지라도 그 부모가 겪는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작가 박완서의 작품 중에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첫 장부터 끝까지 이길 수 없는 슬픔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절절한 언어로 풀어낸 책이다. 대학생이 된 아들을 갑자기 잃고 나서 작가는 전국의 수도원을 전전하면서 슬픔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오랜 기도와 방랑을 지나서 그는 고백한다. 슬픔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슬픔을 이제 극복할 때도 되지 않았냐며 건네는 타인의 위로가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어쩌면 작가는 이 책 한 권으로도 가슴 속의 슬픔을 다 표현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던 유일한 책이었다.

최근 어느 전직 국회의원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향해 막말을 쏟아냈다. 그만 해쳐먹으라고. 자식 잃은 슬픔도 정도껏 하라는 뜻이다. 고약한 언어표현도 그렇지만 타인의 아픔을 너무 편리하게 해석하고 진단해버리는 그의 생각이 더 당혹스럽고 두렵다. 아마 그도 알 것이다. 인간의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은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시간이 지난다고 쉽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맨 정신으로 지켜보면서 절규하는 어린 아들 딸의 모습이 어찌 시간이 흐른다고 희석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순간이나 밥을 먹으면서도 부모들은 이 아픔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매일 매일 아픈 기억을 강화하고 슬픔에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견디다 못해 매일 죽음을 옆에 두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보기 불편하다고, 이제 그만 잊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문명사회의 인간관계는 아닐 것이다.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 즉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국가의 구성원으로 같이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중요시 되지 않는 사회를 문명사회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자녀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아픔을 견디며 산다. 그리고 매일 매일 아픔을 완화하는 말들을 만들어 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메멘토모리. 카르페 디엠. 내가 아는 한 철학교수의 카톡에도 이런 종류의 격언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누군들 힘들지 않으랴. 이러한 말들은 어쩔 수 없는 재난이나 자기 스스로가 야기한 아픔을 치유하는 오래된 처방이다. 그러나 타인의 욕심이나 실수로 야기된 아픔은 이런 말들로는 위로받지 못한다. 여기에는 원망과 분노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향한 분노와 원망이 바탕에 자리한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분노와 원망의 당사자에 대한 용서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이 원리는 심오한 철학이나 심리학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 용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위안부 할머니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란 것도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죄였다. 용서하고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국가조차도 사죄를 두려워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수록, 역사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을수록 더 그렇다. 일본과 독일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독일은 아우슈비츠 피해자들이 거의 사망한 지금까지도 끊임 없이 사죄하고 있다. 마지막 한 사람의 아픔에도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으로 똑같은 상황이 오면 또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간접적인 표현이다. 자식들을 물속에 수장 당한 부모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슴 속의 분노와 원망을 지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식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함께 지켜보아야 한다. 물론 용서를 구하는 진정한 사과와 함께. 김상곤 독일 만하임대학 초빙 연구원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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