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실용음악도

국영수는 성공의 필수요소로,
음미체는 취미요소로만 보는 건
진리를 함부로 재단하려는
풋내기의 객기와 다를바 없어
인생의 완전성 찾아가는 여정을
삶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국영수-음미체는 일생을 같이다닐
상호보완적 동반과목임을 알아야

과학을 논하는 인문학도들, 인문학을 얘기하는 과학도들의 모임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인문학(Humanities)과 과학(Science) 사이에 놓인 벽을 뛰어넘어 상호이해수준을 높이자는 참으로 바람직한 노력이다. 바야흐로 인류에게 도래하고 있는 4차산업혁명시대에 잘 적응하려면 인문학과 과학을 유연하고도 맵시 있게 동시 섭렵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과 맥락을 같이하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화학에서는 산성(Acidity)을 나타내는 척도로서 PH 스케일을 사용한다. 즉 PH가 1이면 극 산성이고 숫자가 커가면서 약 산성을 거쳐 7이면 중성, 다시 약 알칼리성을 거쳐 14가 되면 극 알칼리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수치화하여 생각하려는 지극히 자연과학도다운 발상을 전체 학문분야에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마도 추상(抽象)과 감성(感性)의 대표주자인 종교와 예술은 이 스케일의 가장 왼쪽인 PH 1~2정도에, 인문학의 대표주자인 역사학·철학은 PH 4~5 정도에, 경제학·법학 등 사회과학은 PH 6~8 정도에 위치할 것이요, 수학·물리학 등은 PH 10~12정도에, 구체(具體)와 현실(現實)의 대표주자인 의학과 공학은 가장 오른쪽인 PH 13~14정도에 위치하지 않을까?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보면 예술가와 공학엔지니어는 그 스케일상 위치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상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뼛속까지 공돌이인 나는 예술, 특히 음악에 관심이 많다. 재즈피아노에 흠뻑 빠져있던 2년 전 어느 날 울산 무거동의 조그만 연주홀에서 열린 한 재즈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구경 간 적이 있다. 연주회라 해보았자 관객이 30명도 안 되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과연 그의 연주 실력은 범접하기 힘든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는 기존의 유명재즈곡도 연주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작곡한 노래도 여러 곡 선보였고, 연주 후엔 자작곡의 제목과 작곡배경에 대해서도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놀라웠던 사실은, 그가 작곡한 곡의 제목이 ‘Energy and Momentum(에너지와 운동량)’, ‘Elasto-plasticity(탄소성)’ 등 매우 생경한 것이었다. 노래의 제목으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연과학, 정확히는 물리학의 용어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실 저는 한국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 과정에 있었는데 그만 재즈피아노에 흠뻑 빠져, 학위과정을 포기하고 재즈피아노로 갈아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면서도 과거에 몸 담았던 전공이 생각날 때마다 이런 곡을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연주회가 끝난 후 그는 나와의 대화에서 “과학적 마인드가 오히려 예술성을 풍부하게 해주고, 예술적 감각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도움을 주면주지 서로 부딪치지는 않는 것 같다”라고 설파하는 것이었다. 나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과학과 인문학, 특히 과학과 예술의 마인드는 서로 상충적이라는 편견아래 그 둘을 대립시키기에 급급하며 살아온 나에게, 나보다 어림잡아 20살은 어린 그로부터 과학과 예술의 상통(相通)을 전해들을 줄이야. 그리하여 생각해보니 역사상 과학과 인문학, 과학과 예술 사이를 왕래하며 인생의 꽃을 피우고 나아가 인류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뇌리에 떠올랐다.

철학자이며 수학의 아버지로서 음악·음향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밝힌 피타고라스(BC 582~BC 497), 음악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덕성이라고 설파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공자(BC 551~BC 479), 인류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칭송받는 과학자로 그림에 원근법을 도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수학적 대위법을 작곡에 도입한 바흐(1685~1750), 음악의 기하학적 기반을 제공한 수학자 오일러(1707~1783), 예술적 감성과 과학구조적 노력을 혼합하여 작곡에 쏟아 부은 베토벤(1770~1827), 인류애 실천의 대명사로서 의사이자 피아니스트인 슈바이처(1875~1965), 바이올린을 사랑한 사상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1879~1955) 등 위인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존하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란 사실에 몸이 떨려왔다. 인류역사의 줄기는 성인(聖人)과 철인(哲人)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지만, 그 줄기에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은 과학, 철학, 인문, 예술 간의 경계를 넘나든 이러한 뛰어난 인재들, 완전체(完全體)를 추구한 천재들의 노력에 의했다는 사실에 크나큰 경외심이 돋는다.

과학과 진리도 구별 못한 채 별거 아닌 풋내기 과학지식으로 평생 동안 문학·역사·철학·종교·예술을 포함하는 진리영역을 과학이라는 도구로 증명하려 해왔던 나의 행위가 한없이 낯뜨거울 뿐이다. ‘어렸을 땐 국영수(國英數), 나이 들면 음미체(音美體)’라는 말이 현직에서의 성공 필수요소와 퇴직 후의 취미 필수요소로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이 분명하다. 국영수와 음미체는 초급학문스케일에선 서로 멀리 떨어진 대척지점에 위치하지만, 혹시 행복을 인생의 완전성 추구 과정에서 찾고자 한다면, 이들은 일생동안 같이 붙어있어야 할 상호보완적 동반 과목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보인다.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실용음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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