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정치인이 맡은 대표행위에 대해
정당·정확성 점검하고 때론 수정도 해야
국민이 깨어있어야 큰 정치인을 만들어

▲ 김광수 서강대 로스쿨 교수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한다. 모여 앉아서 하는 대화 가운데 정치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고 몰입도가 크다. 누구는 뭐가 잘못되었고 어느 당은 뭐가 잘못되었고, 한 번 둑이 터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은 계속된다.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안주는 필요도 없다.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혹은 내가 그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이런 점에 주의한다. 첫째는 목소리를 낮추어야 한다. 공공의 장소는 다른 사람들도 같이 사용하는 공간이므로 소음을 피해야 한다. 둘째는 발언을 독점하지 않아야 한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네 사람이 모였으면 적어도 다른 두 사람이 말하기 전에 다시 자신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반복의 금지이다. 한자리에서 한 주제에 관해서 한 번만 주장하여야 한다. 같은 주장을 반복할 필요성은 없다.

정치적 담론은 갈등과 분쟁의 소지가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하여야 한다. 나의 사소한 발언이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다. 1960년대 말 독일에서는 학생 운동의 여파로 죄우 대립이 심각하게 문제되었다. 이 당시에 학교에서의 정치교육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이 합의되었는데 ‘보이텔스바흐 합의’로 알려져 있다. 이 합의는 강압 금지, 논쟁성에 대한 요청, 이해관계 인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논쟁성에 대한 요청’이란 정치적 견해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대안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장단점을 파악하는 과정이다. 이해관계 인지란 특정한 정치적 상황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입장을 선택하도록 한다.

각자의 관심과 능력이 다양하듯이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도 적극성의 차이가 크다. 가령 어떤 SNS(전자적 사회관계망)에 100명이 참가하고 있다고 하면 능동적으로 글이나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방관자적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이 현재 진행되는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쁘다거나 다른 이유로 인하여 개입을 유보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역량을 기준으로 시민들은 관찰자적 시민, 잠재적 참여 시민, 그리고 능동적 참여 시민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관찰자적 시민이 다수이고 이들은 대체로 투표장에 나간다. 잠재적 참여 시민은 개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정치적 영향력 있는 조직이나 활동에 관심이 있으며 직접 참여한다. 능동적 참여 시민은 정치적 조직을 스스로 만들거나 간부로서 활동하고 선거운동에 직접 뛰어드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은연중에 정치적 행위는 경계의 대상이 되고, 정치인은 일반인과 다르다는 의식이 유포되고 있다. 이는 그간의 역사 및 정치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과연 그런가? 정치인은 시민들 가운데 일인이며, 시민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대변하는 대표자이다. 그러니까 정치인들이 가지는 생각, 정치인들이 꿈꾸는 미래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과 다를 이유가 없다. 정치적 담론의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치인들이 하는 시민 대표행위의 정당성과 정확성을 확인하고 때로는 수정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보의 공유가 필요하다. 대표자들이 하는 발언과 표결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표자의 행위를 검증하고 평가하여야 한다. 이는 개개인이 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다양한 시민단체의 조직과 활동을 통해서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지도자는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정치는 우리 삶에 가장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 및 집행과정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담론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 있다.” 만일 그 물길이 깊고 넓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국리민복을 책임질 수 있는 큰 정치인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김광수 서강대 로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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