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소운 울산옹기박물관 큐레이터

외고산 옹기마을이 다른 곳과 차별되는 이유는 옹기장의 집성촌이었다는 점이다. 과거 번성할 당시에는 350여명의 도공이 모여 옹기를 생산했고, 각자의 업무를 분업화하여 체계적으로 운영했다. 외고산이 한창 활성화되었을 때는 ‘남창옹기’라는 유명세를 타고 청량리역을 넘어 일본, 미국 등지로까지 수출되면서 울산의 과거 산업문화를 대변했다. 그리고 그 시초는 외고산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약 60년 전, 고(故) 허덕만이 영덕에서 외고산으로 와 처음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외고산 일대는 밭으로 조성된 언덕배기 정도에 불과했다. 허덕만은 지금의 영남요업 자리에 ‘신일토기’라는 이름으로 옹기점을 세우고, 옹기생산을 위한 가마를 박았다. 사업 초창기에는 부족한 자금에다 판로까지 개척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가마를 작게 만들고, 옹기점도 작게 지어서 운영했다. 그러다 옹기점이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는 마을 주변의 유지로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이어 옹기점을 개업했고, 전국 각처에 있던 사람들도 외고산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허덕만을 중심으로 기술을 익히기 위한 전수자 집단까지 형성되었다. 지금 옹기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진삼용, 배영화, 조희만, 장성우 모두 허덕만 문하에서 기술을 배워 옹기점을 설립한 사람들이다.

▲ 외고산 옹기마을의 출발지.

하지만 허덕만의 갑작스러운 변고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였고, 고(故) 최상일이 ‘영남요업’이라는 이름으로 옹기점을 인수하여 다시 운영에 들어갔다. 최상일은 현대식 장비를 도입하고 분업화 방식을 더욱 체계화하여 공장제 방식을 채택했다. 예를 들면 흙에서 공기를 빼는 토련기 사용을 시작으로 흙가래를 만드는 수동·기계롤러를 사용했고, 부분적으로는 석고틀을 제작하여 대량생산체제를 이끌었으며 시간과 노동력의 단축을 위해 가스가마를 도입했다. 즉, 전통과 현대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제작과 소성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며 새로움을 열어갔던 곳이 바로 지금 외고산 입구이자 영남요업이 자리한 곳이다.

영남요업부지가 지금은 비록 빈 공장의 모습으로 남아 변화의 단계에 이르렀으나 외고산 옹기의 첫 출발지로 장인의 맥을 이어가던 공간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길 기대해본다. 문소운 울산옹기박물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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