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문화사업지원팀 차장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예술 또한 ‘현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발생과 동시에 과거가 되기에 ‘현재’라는 의미는 성립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예술의 등장은 과학의 발전이나 최신기술의 개발처럼 현 세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는 다른 것 또는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는 것에 가깝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질 때도 많다. 더 나은 것이 아닌, 무언가 다르거나 또는 새로운 것이 주는 이질감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익숙한 예술만 생산해낼 수는 없다. 기존의 것들이 주는 불편에서 비롯된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곧 예술의 본질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예술은 어렵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미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예술을 정의할 때 ‘컨템포러리(Contemporary)’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동시대의’라는 의미로 ‘현재’를 정의할 수 없는 예술에겐 그나마 최선의 선택지인 것이다. 동시대예술(Contemporary Arts)은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이 섞여 있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다. 익숙한 불편함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동시대예술이 만들어내는 이질감, 즉 과거에 비추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변화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동시대예술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동시대예술을 한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새로운 가치를 발굴한다는 의미이고, 동시대예술을 받아들인다는 건 이전에는 몰랐던 문화적 진일보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많은 도시들에서는 동시대예술을 수용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당수는 그 수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여타 도시들은 영광이었거나 상처였던 그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또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과거를 바탕으로 도시의 미래를 그려나간다. 하지만 울산은 다르다. 울산의 과거는 산업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과거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은 여전히 울산의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이며, 미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울산의 산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과거가 곧 미래인 도시. 이것이 울산이라는 도시의 숙명이자 곧 정체성인 것이다.

산업도시 울산은 과거와 미래의 기로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동시대예술과 너무도 닮아 있다. 미래를 추구해야 함에도 결코 과거를 져버릴 수 없는, 그러면서도 기필코 한걸음 나아가야 하는 그 발걸음이 닮아있는 것이다.

한 도시의 예술정책은 그 도시의 문화 정체성을 대변한다. 도시의 역사, 문화, 정치 등 모든 것이 내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울산의 예술정책에 동시대예술이라는 단락을 더해봄이 어떨까? 썩 어울리지 않은가? 현재의 예술이 다 동시대예술이라고 하지 않겠냐만 이를 드러내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 도시의 모습을 닮아가는 예술, 예술을 닮아가는 도시. 지금이야말로 울산은 동시대예술에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문화사업지원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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