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13. 감입곡류하천 대곡천과 반구대(하)

▲ ‘언양 반구대’ 그림과 일대 풍광. 선비들이 올라가 있는 반구대 너럭바위 밑에는 반구서원으로 보이는 10여개의 서원건축물이 모여 있다. 대곡천 건너편에는 집청정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는 반구암으로 추정되는 암자가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대곡천 일대 절경 그린 겸재의 ‘반구’
권섭의 화첩 ‘공회첩’ 수록돼 알려져
왼쪽 하단 집청정 추정 누각까지 생생
권섭의 영호남 여행기 ‘남행일록’중
반구대 일원 묘사 현재 모습과도 유사
‘교남화첩’에 실린 그림 ‘언양 반구대’
풍류 즐기는 조선 선비들 모습도 담겨

대곡천 감입곡류가 만들어낸 절경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도 표현됐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유행한 화풍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산천을 직접 답사하고 화폭에 담은 산수화다. 겸재 정선(1676~1759, 숙종2~영조35)은 금강산과 영남 일대를 돌아 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해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반구대를 배경으로 그린 정선의 <반구(盤龜)>라는 그림이다.

정선의 <반구>는 지난 2008년 학계에 소개됐다. 이 그림은 옥소(玉所) 권섭(1671~1759)이 만든 화첩인 <공회첩(孔懷帖)>에 실려 있다. <공회첩>에는 아우 청은(淸隱) 권영(1678~1745)의 편지와 정선의 그림 2점(<반구> <옹천>), 권섭이 쓴 발문이 수록돼 있다.

 

▲ ‘언양 반구대’ 그림과 일대 풍광. 선비들이 올라가 있는 반구대 너럭바위 밑에는 반구서원으로 보이는 10여개의 서원건축물이 모여 있다. 대곡천 건너편에는 집청정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는 반구암으로 추정되는 암자가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진경산수화 <반구>, 그리고 권섭의 남행일록

울산대곡박물관에서 펴낸 <대곡천 문화사와 2019년 울산대곡박물관>에 따르면 권섭의 아우 권영은 55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대사간을 역임했다. 권영의 편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형 권섭에게 보냈던 것이다.

아우가 죽자 권섭은 동생의 편지와 그림을 화첩으로 제작해 자신의 발문을 붙였다. 화첩의 제목은 <孔懷帖(공회첩)>이라고 붙였다. ‘공회(孔懷)’는 ‘대단히 사모한다’는 뜻으로, 형제간 우애가 좋다는 뜻이다. 권섭은 동생과 함께 겸재의 그림을 즐겼는데, 아우가 죽기 9일 전에 그림을 보내왔다고 발문에 밝혔다. 75세의 권섭은 발문에서 “아침 저녁으로 그림을 감상하면서 동생을 향한 그리움에 많은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반구>라는 그림은 겸재가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을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징표로서도 주목을 받는다. 권섭·권영 형제의 우애 덕분에 이 그림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을 보면 왼쪽 하단에 집청정(集淸亭)으로 보이는 누각이 보인다.

▲ ‘언양 반구대’ 그림과 일대 풍광. 선비들이 올라가 있는 반구대 너럭바위 밑에는 반구서원으로 보이는 10여개의 서원건축물이 모여 있다. 대곡천 건너편에는 집청정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는 반구암으로 추정되는 암자가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권섭은 숙종 때 송시열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떠나게 되는 것을 보고, 일생을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 탐승(探勝) 여행을 하면서 보냈다. 조선시대 최고의 여행가가 된 그는 54세 때 전국의 숲과 계곡, 정각 수천 곳을 구경했다고 한다. 이후 권섭은 나이 60세였던 1731년(영조7) 3월13일 1박2일 일정으로 반구대를 여행한 바 있다. 그가 영호남 일대를 여행하며 매일의 체험을 기록한 <유행록(遊行錄)> 가운데 ‘남행일록(南行日錄)’을 보면 반구대와 그 주변을 걸으면서 풍광을 감상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반구대에는 골짜기와 암천(岩泉)이 아주 볼 만한데 최씨가 서쪽 언덕에 지은 반구정(盤龜亭)에는 여러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빽빽한 대나무와 노송(老松) 사이로 붉은 복사꽃이 피어나 언덕을 따라서 바야흐로 흐드러지고 있었다. 돌 빛은 검푸르고 물빛은 맑으며, 정자의 양식과 규모가 남쪽에 많이 있는 게 아니었지만…”

권섭이 반구대를 돌아보고 쓴 ‘남행일록’은 그의 공회첩 속 정선의 그림만큼이나 사실적이다. ‘빽빽한 대나무와 노송(老松) 사이로 붉은 복사꽃이 피어나 언덕을 따라서 바야흐로 흐드러지고 있었다. 돌 빛은 검푸르고 물빛은 맑으며…’라는 표현은 반구대 맞은편의 산책길과 대나무숲, 복사꽃 핀 언덕 등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돌 빛은 검푸르고 물빛은 맑다’는 표현은 반구대 암석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다. 대곡천 지질과 암석은 퇴적암이면서 ‘대구층’으로 분류된다. 대구층은 주로 점토 크기의 퇴적물들이 쌓여 형성된 암석으로, 변성 작용이 일어나 경도가 비교적 높고 암석의 색깔은 푸른 빛을 나타낸다.

▲ ‘언양 반구대’ 그림과 일대 풍광. 선비들이 올라가 있는 반구대 너럭바위 밑에는 반구서원으로 보이는 10여개의 서원건축물이 모여 있다. 대곡천 건너편에는 집청정이 보이고 그 오른쪽에는 반구암으로 추정되는 암자가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교남화첩 속의 <언양 반구대>반구대를 배경으로 하는 또 하나의 그림이 <언양 반구대(彦陽 盤龜臺)>다.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교남화첩(嶠南畵帖)> 속에 들어 있다.

이달희 교수에 따르면 <언양 반구대> 그림이 최초로 일반에 소개된 것은 1996년 5월19일~6월2일 열린 간송미술관 개관 25주년 기념 ‘진경시대전’ 전시회로, 당시 모 중앙일간지에서 100여점 이상의 전시작품 중 이 그림을 대표작품으로 게재한 바 있다. 이 그림에는 낙관이 없는데, 이를 두고 정선의 그림으로 보는 이도 있고, 정선의 손자인 손암 정황(1735~?)의 작품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림의 풍경은 지금의 반고서원 주변에서 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을 보면 정몽주와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올라가 시를 짓고 여흥을 즐겼다고 전해지는 반구대 너럭바위 위에 갓을 쓴 선비들이 올라 가 있다. 그 밑에는 반구서원이 모습이 보이고 대곡천 건너편에는 집청정과 작은 나무로 둘러싸인 반구암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그려져 있다.

글=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드론촬영=최광호, 사진자료=울산대곡박물관·반구대포럼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