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4)

▲ 카투만두 최대의 힌두교사원으로서 최고의 성지인 파슈파티나트 화장터. 1000루피나 되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지만 정작 사원 안에는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고 일반 관광객은 화장터에서 장례의식만 볼 수 있다.

한때 ‘빛의 도시’로 불리던 옛 왕도
카투만두는 기형적 근대도시로 변해
지역 최대 힌두사원 파슈파티나트엔
죽은자의 화장마저도 관광거리로
사원을 개조한 인근 양로원에서는
노인들이 내세를 기다리고 있는듯

한도시의 관광명소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고 해서 그 도시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로변을 스쳐가는 풍광만으로도 그 도시의 수준이 쉽게 드러나곤 한다. 특히 공공시설의 수준은 그 도시와 국가의 수준을 가장 잘 반영한다. 공공시설의 시스템, 품질, 서비스 등은 도시가 시민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제공하는 기본적인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인도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 포장된 도로였는지 알 수 없게 닳아 헤진 도로는 스모그와 같은 흙먼지를 내뿜는다. 차들은 깊게 패인 웅덩이를 피하느라 차선도 없는 도로 위를 이리저리 돌진한다. 버스와 트럭, 자전거 인력거와 오토바이, 심지어 짐승들까지 뒤섞인 도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치와 배짱의 아수라장을 이룬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없으니 차가 인도로 뛰어들면 사람이 피해야 하고, 사람이 차도로 뛰어들면 차들이 피해야 한다.

카투만두는 히말라야에서 발원하는 비슈누마티 강과 바그마티 강 사이에 소재한다. 마르지 않는 물줄기는 풍부한 수자원뿐만 아니라 교역을 위한 수로를 제공했다. 말라 3왕국 시대에 이 도시는 칸티푸르(kantipur), 즉 ‘빛의 도시’로 불릴 만큼 성장했고 독립된 왕국의 왕도가 되었다. 하지만 통일 네팔왕국의 수도가 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근대화, 도시화의 파도는 중세 도시조직을 와해시키고 팽창시켜 기형적인 근대도시로 변형시켰다. 도시로 몰려든 서민들은 생존을 위해 ‘저비용 고효율’의 근대건축으로 도시를 점령해 갔다. ‘빛의 도시’라는 옛 영화의 증거는 달발 왕궁광장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작은 유적들뿐이다. 달발 광장 또한 허접한 근대도시의 한 가운데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랄릿푸르처럼 카투만두의 달발광장도 사원으로 가득 차 있다. 가히 ‘사람보다 신들이 더 많이 사는 도시’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각양각색의 사원들이 왕궁 앞 거리를 채우고 있다.

카투만두 왕궁은 ‘하누만 도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문 앞에 하누만이라는 원숭이 신을 세웠기 때문이다. 라마의 가장 독실한 숭배자였던 하누만을 궁 앞에 세워 적들과 악귀와 자연재해로부터 궁을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이 궁은 19세기 이래 네팔의 정궁이었으나 양식적으로는 랄릿푸르나 박타푸르 왕궁에 미치지 못한다. 원래 55개의 중정을 가졌던 왕궁 규모도 현재 9개 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었다.

네와르 궁전의 전통양식은 말라 시대에 형성된다. 구조와 형태는 목조사원과 비슷하지만 배치와 공간구성은 중정(chok)을 갖는 부농주택에서 기원한다. 3층 건물로 둘러싸인 ㅁ자형 안마당이 단위가 된다. 안마당은 장중한 중층 지붕과 화려한 창호들로 품격을 갖춘다. 중정의 모서리에는 탑을 세우는데 그 탑의 형식이 각 중정의 특징을 이룬다. 여러 대의 왕들이 각기 중정을 증축해 가면서 여러 개의 중정과 사원을 갖는 복합군으로 발전했다. 깊고 독특한 마당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궁전건축은 네와르 전통의 또 다른 유산이었다.

하지만 라나(Lana)시대에 들어서면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라나의 통치자들은 전통 예술을 보존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19세기 유럽의 유행에 매료되어 이를 모방하는데 치중했다. 버킹검 궁이나 베르사이유 궁을 모방한 궁전을 짓는데 재정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카투만두 궁전의 한 중정도 이 시기에 유럽식으로 개축되고 말았다. 덕수궁 석조전처럼 전통 양식의 맥락을 파괴해 버렸다. 이는 전통의 단절만이 아니라 통치자와 백성의 괴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30분 정도 나가면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과 만날 수 있다. 파슈파티나트(pashupati nath)는 카투만두 최대의 힌두교사원으로서 최고의 성지이다. 입장료를 1천 루피씩이나 받는다. 하지만 사원 안으로는 힌두교도만 출입할 수 있다. 매표소에는 어떤 안내도 없으니 눈치가 빠르지 않다면 입장권만 들고 도로 나오는 수밖에 없다. 입장료는 사원 뒤에 있는 화장터를 관람하는 비용이다.

사원 뒤는 바그마티 강에 접하여 계곡을 이루고 화장터가 조성되어 있다. 화장터에는 이미 한 사람의 장례의식이 진행 중이다.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 다리 위에서도, 부도탑에서도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모여 카메라를 들이댄다. 화장연기가 피어오르며 시체가 태워진다. 도저히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는 문화적 관습이라 치부하더라도, 도대체 화장하는 모습도 관광거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명예교수

공포영화처럼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계곡을 나서는데 범상치 않아 보이는 전통양식의 건물 하나가 발길을 잡는다. 무의식적으로 접근해보니 양로원이다. 건물은 19세기에 사원으로 건설된 것이지만 현재는 정부가 지원하는 유일한 양로원이라고 한다. 중정에는 다섯 개의 하얀 힌두탑이 남아있고, 아케이드형 건물이 중정을 에워싼다. 돌볼 사람이 없는 노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네팔에서는 가장 운이 좋은 노인들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네팔 노인들은 농장의 품삯꾼으로, 짐꾼으로, 채석장 인부로 하루 12시간 이상을 노동하면서 연명하고 있다. 또한 많은 노인들이 가족으로부터, 정부로부터 버림받고 노숙자로 죽어간다. 여기서는 음식과 잠자리와 의료가 제공되니 평안한 노후가 보장된 곳이다. 오직 50여명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그들에게 이곳은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아니라 ‘내세를 기다리는 집’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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