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봄이 소멸해간 초하의 들녘, 산은 이미 여름옷으로 갈아입었고 잎들은 더욱 강성해져 한낮의 햇살에 농밀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멀리 산하를 굽어보는 늙은 소나무, 가지마다 피어오르던 송홧가루도 이제는 끝물인양 뜨음해졌다. 송홧가루 시즌의 마감이다.

송화는 바람과 함께 가루가 되어 소멸한다. 소멸하며 드러낸다. 그제서야 우리는 송화의 존재를 인식한다. 소리 없는 초목이 바람에 울듯, 송화의 분신들은 바람을 따라 봄이 소멸해간 들녘을 넋처럼 떠돌다 마침내 대지위에 내려앉는다. 그러나 대지는 송화의 화분을 한곳에 결박하지 않는다. 가루가 된 송화는 이 땅에서 영위되는 모든 삶들의 무궁함을 기원하며 대지의 물길을 따라 산하를 굽어 흘러간다.

이른 봄, 솔의 잔가지에 물이 오르면 그 끝에는 어김없이 봉오리가 맺힌다. 이것이 송화다. 송화는 생긴 모양은 열매에 가깝지만 엄연한 꽃이다. 어린송화는 풍부한 수분과 달콤함을 지니고 있어 어릴 적 우리가 자주 먹던 꽃이다. 봄이면 뒷동산 소나무 아래에는 우리가 먹다버린 송화가 시즌 끝까지 널려있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필요 이상으로 채취했던 우리들의 한심한 집착이 빚어낸 송화들의 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봄이 진행되면 송화는 차츰 가루가 되어 소멸한다. 송화의 소멸은 곧 봄의 소멸이다. 봄이 소멸해간 공간사이로 송홧가루가 날리면 우리들은 비로소 가버린 봄을 지각했고 하염없이 다음 봄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토종소나무인 적송(赤松)을 백목의 으뜸(白木之長)으로 여겼다. 집에 소나무가 자라면 길조라 하여 만사가 형통한다고 기뻐했고, 적송이 흥하면 국운이 흥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나무는 여전히 겨레의 기상이고 방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홧가루에는 다양한 무기질과 아미노산은 물론이고, 비타민과 카로틴, 셀레늄 등의 풍부한 항산화제가 함유되어 있다(식품과학기술대사전).

송화는 봄과 함께 소멸해갔다. 초하의 공간을 장악한 송화의 분신들은 내년에도 어김없이 대지위에 내려앉아 대지를 산화적 손상으로부터 지켜 낼 것이고, 이 땅에서 영위되는 모든 삶들의 영원성을 기원하며 대지의 물길을 따라 산하를 굽어 흘러 갈 것이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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