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울주군 삼동면은 전체 500여 가구 가운데 영산신씨(靈山辛氏)가 약 100가구에 이른다. 인구 수로는 삼동면 인구의 약 17%를 차지한다. 1969년 울산공단 공업용수 공급원인 대암댐에 영산신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인 하잠, 둔기마을이 수몰되기 전에는 400여가구에 달했다. 대암댐 수몰과 산업발달로 잇따라 시골마을을 뜨면서 지금은 100여 가구만 남아 하잠, 둔기, 지랑, 방기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조일리 지랑마을은 30여 가구 가운데 20여 가구가 신씨로, 남아있는 신씨 집성촌 가운데 가장 번성한 마을이다.

 울산에서 부산 방면 국도를 타고가다 울산예술고등학교가 보이는 대복 삼거리에서 오른쪽(통도사 가는 길)으로 꺾으면 구불구불한 왕복 2차선 도로가 이어진다. 첫번째 갈래길에서 왼쪽(반천 반대방향)으로 꺾어 하잠마을, 삼동면소재지인 사촌마을, 금곡마을, 보은마을을 지나 오른쪽 도로가에 버스정류장 표지판과 큰 나무 두 그루가 있는 마을이 지랑마을이다.

 언뜻 보기에는 두 그루의 나무 중에 보다 늙어보이는 팽나무가 당수나무 같지만 당수나무는 느티나무다. 원래는 장정 8~9명이 둘러싸야 할 정도의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당수나무가 있었지만 해방전해인 1944년 가을 정부에서 배를 만들 목적으로 나무를 베어버린 이후 두번에 걸쳐 심은 나무다.

 삼동면 신씨 가운데 최고령인 신병호(87)옹은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는데도 나무 넘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다"며 "그 나무로 배도 못만들고 이듬해 해방이 돼 버렸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도로 양쪽으로 난 마을의 가운데 있는 당수나무는 옛부터 지랑마을 사랑방 역할을 해 왔다. 여름철에는 밤낮으로 더위를 피해 멍석을 매거나 새끼를 꼬는 장소였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뙤약볕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서 소일거리를 하면서 늙은 당수나무 아래서 보낸 젊은 시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운다.

 신병호옹은 "옛날에는 마을을 잡으면 제일 먼저 나무를 심고 당수나무로 섬겼으니 이 마을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 수 있겠지요"라며 배를 만들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잘려나간 "역사의 당수나무"를 강조한다.

 영산신씨가 울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 4대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래 수군절도사를 지낸 신을화(1384~1450)는 언양을 지나다가 우연히 상북면 지내리 제궁곡을 보고 살기 좋을 것 같아 자리를 잡았다. 이어 3대까지 지내리에 살다가 삼동면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을화의 증손자인 축(1506~1577)이 1545년 벼슬을 그만두고 하잠마을에 내려온 뒤부터다. 축의 아들 광윤(1549~1617)이 낳은 세 형제 가운데 장남인 전은 계속해서 하잠에 뿌리를 내렸고, 둘째 훤은 방기마을, 막내 진은 조일·지랑마을에 각각 정착했다. 둔기마을은 전의 증손자가 뻗어져 나와 세를 형성한 마을이다.

 그래서 하잠마을이 가장 큰집이고, 방기마을이 작은집이다. 조일·지랑마을은 막내다. 지랑마을은 달리 말랑(末郞)마을이라고 불렸다. 광윤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의 후손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산이 길게 등성이가 진 마루를 뜻하는 지랑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고쳐 부르게 된 이름이다.

 방기, 하잠, 둔기, 말랑 등 마을이름에 모두 풀초(艸)자를 붙여 표기하기도 했다. 이는 신(辛)씨의 원래 성이 "莘"이라서 마을 이름에도 풀초(艸)자를 붙이면 잘산다는 말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랑마을 출신인 신상섭 울주군청 건축허가과장은 "광윤의 손자가 12명이었는데 모조리 벼슬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은 달라도 한 집안이라는 의미에서 "삼동(三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고 설명했다.

 당수나무 아래에서 도로 건너 맞은편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나즈막한 산이 보인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산은 등성이가 칼자루처럼 길어 칼등이라고 불린다. 뒤로 용마의 안장처럼 생긴 용마등과 무관의 투구와 흡사한 모양의 투구등이 차례로 있지만 최근 골프장 공사로 산 곳곳이 깎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문중 총무일을 맡아보고 있는 신석균(72)씨는 "광윤 할아버지와 광윤의 아들 전이 임진왜란 때 스스로 호를 의용장이라고 부르며 난에 참여하는 등 후세에 무과급제를 한 조상이 많은데 아마도 산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고 전했다.

 신상섭씨는 "제가 어릴적에만 해도 동네 전체에 신씨가 아닌 성은 딱 한 집 밖에 없었어요. 바로 지랑문중 봉양재를 관리하는 재실지기였습니다. 60년대 초에는 개방물결에 따라 어른들이 재실지기 제도를 없앴습니다"고 말했다.

 지랑마을에 있는 "김해김씨 열녀각"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30리 길을 걸어다니며 번 품삯으로 시부모를 공양한 배내골(양산시 원동면) 출신의 김씨여인을 기리는 것이다. 1748년에 세워졌으나 화재로 소실된 이후 1960년대에 다시 복원됐다.

 지랑마을 출신 가운데 교육계에는 신상전(덕성여대 총장), 신기석(동아대학 교수), 신태용(울산과학대학 교수), 신기봉(신라대학 전임강사)씨가 활동하고 있다. 신두환, 신상기씨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신필열 삼성야구단장도 지랑마을에서 자랐다.

 공무원은 신형강 현 국방부 육군대령, 신상섭 울주군 허가과장이 있다. 신기열 전 삼동출장소장, 신인환 초대 군의원, 신기홍 경남 종축장장, 신기성 삼남면장, 신상현 초대 삼동면장이 지랑마을 출신이다.

 이밖에 삼동면 출신 가운데 신격호 롯데그룹회장, 신춘호 농심사장, 신원호 경상일보 사장, 신동림 울산시남구 새마을협의회 회장(문중 회장), 신기운 울산수퍼마켓협동조합장, 신동두 울주군의원이 둔기마을에서 자랐다. 신상주 삼동초등학교 총 동창회장은 왕방마을에서 자랐고, 신기태 메가마트 울산점장은 금곡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박은정기자 musou@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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