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한목소리로 외친다고 해서
모두 민주적이고 공분이라 할수 없어
감정적 흥분과 이성적 공분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하다
공분이 자칫 폭력이 될까 우려

▲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실용음악도

요즘 이러저러한 일로 ‘분노(憤怒)’하여 뚜껑이 열린 사람이 많다. 분노에는 ‘공분(公憤)’도 있고, ‘흥분(興奮)’도 있다. 공분이란 사회의 정의나 공공의 도리나 이익에 반하는 일에 대한 대중의 이성적 분노로서 문화선진국에서는 지식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로 여긴다. 자유민주주의 최고의 가치인 개인의 자유가 지나쳐 혹시 만용이나 폭력 등 질서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사전에 방어한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라 아니할 수 없다. 한마디로 공분은 불의(不義)에 대한 대중적 분노인 것이다.

그러나 공분이 자칫 흥분이나 폭력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지배계급의 향락과 국가재정파탄 그리고 피지배층 몰락이라는 절대 절명의 상태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키는 발단이 되었으나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 나아가 혁명 주동자인 로베스피엘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처형한 것까지 공분의 영역에서 이해할 수는 없다고 본다.

자유당 정권 시절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발단이 된 4·19혁명도 공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지만 결정적 사건이었던 이기붕 부통령 가족의 집단자살 사건은 당위성을 넘어선 비극이었다고 본다.

아무튼 공분은 어떤 행태가 인간적으로 고약하고 밉다거나, 나와 생각과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거나, 개인감정이나 복수심 등이 발단이 되는 감정적 흥분과는 엄밀히 다르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시대 때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워 이긴 사람을 관중들이 흥분하여 한목소리로 ‘죽여라’라고 외치면 죽이고, 어느 과격한 종교집단처럼 간음의 죄를 지은 사람을 여러 사람이 둘러싸고 돌을 던져 쳐 죽이는 것은 공분이 아니고 폭력흥분이다.

중국 모택동정권 후반, 평등의 회복과 공산주의 본모습으로의 회귀라는 논리로 기득권층, 지식층 심지어는 안경 썼다는 이유로 시골로 쫓아내고 목숨을 앗아간 완장 찬 홍위병들의 잔혹행위로 점철된 문화혁명, 북한에서 보듯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진짜 이유는 숨기고 별건의 개인비리 등 이유를 조작하여 군중 앞에 세우고 처단의 근거로 삼는 인민재판은 광적(狂的)인 폭력흥분이지 결코 공분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 사람이 한목소리로 외친다고 무조건 민주주의적이요, 공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위 ‘국민참여민주주의’의 실천이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감정적 흥분과 이성적 공분을 구별하는 일은 그래서 어렵고도 중요한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공분사례가 다수 발생하고 있어 고무적인 면도 있지만 우려되는 바도 적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 식 공분의 특징과 문제를 한번 들여다보자. 첫째는 소위 ‘갑질’공분이다. 갑(甲)이 을(乙)에 대해 행하는 불합리한 행위에 대한 대중적 분노다.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욕설과 영수증 투하 사건, 맥도날드 빵 봉투 투척사건, 모(某)회사 사장의 사원에 대한 잔혹한 폭행사건, 한진그룹회장 일가의 물컵사건, 항공기 회항 사건, 국회의원의 공항직원 겁박 사건, 승객의 운전기사 폭행 사건, 백화점이나 식당의 손님이 종업원에게 행하는 욕설비하 사건 등 상대적 우위에 있는 갑이 을에게 행하는 비인간적 행태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 사건이 SNS를 통해 국민적 공분을 유발하면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신분이 톡톡 털려 공개적인 창피는 물론, 대국민사과, 경우에 따라서는 형사적 처벌을 받는 일까지 있다. 이러한 공분의 진행과정을 통해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로 한 발짝 나아가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당사자와 가족에게 행해지는 비인간적 가혹행위마저 ‘자업자득이요, 거참 속 시원하다’라고 개인적 자위(自慰)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편 똑같은 행위를 을이 갑에게 행하는 소위 ‘을질’은 이해와 포용의 문제로 인식되어 혹시 이것이 새로운 한국적 특징으로 굳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사원들의 임원에 대한 감금집단폭행, 운전기사의 승차거부, 서비스업체 종업원의 고객에 대한 공격성 발언 등도 공분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약자는 무조건 선(善)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惡)하다’라는 언더도그마(Underdogma)나 그 반대의 경우도 똑같이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교육과 관련한 공분이다. 우리나라에선 특히 대학입학과 결부되면 단 0.1%의 공평성 침해 요소가 있어도 온 사회로 비화된다. 아버지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 아들이 입학하면 일단 색안경 대상이다. 지난해 숙명여고 사건은 온 나라가 상당기간 시끄러울 정도의 공분을 일으켰으며, 아버지는 감방가고 해당 학생들은 평생 죄를 등에 지고 살아야 하는 등 한 집안을 풍비박산시키는 것으로 결론났다. 개별 대학구성원의 공정성은 아예 믿지 못한다는 전제 아래 대학별 입시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몇 시간동안에 지식정도를 판별하는 수능시험의 공정성만을 믿으며 그 결과가 젊은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나라가 되었다. 우수하지만 빈곤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더 많이 지급하고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일부 국가의 기여 입학제도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한다. 공정이 압도하는 우리의 제도는 입시공정성 확보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지 몰라도 교권의 추락, 교육부 권한 집중과 대학의 자율성 쇠퇴, 판박이교육, 세계최고 수준의 사교육, 동급생 간의 과도한 경쟁유발과 협동심 파괴 등 부정적인 면이 더욱 많다. 아무튼 대입평등과 관련한 사회적 공분 문제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산더미다.

오래전 금강산 구경 갔을 때의 일이다. 금강산호텔에서 한 테이블에 10여 명씩 앉아 비빔밥을 먹는데 국이 5~6개 밖에 안 나와 추가주문을 했다가 ‘옆 동무와 같이 나눠 먹으시라요!’라는 여종업원의 을질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설마 우리나라가 그리 되기까지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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