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존중·이웃사랑 항상 소중하지만
사회에서 그 가치가 점점 희미해져가
급변하는 시대 지켜야할 고귀한 정신

▲ 김광수 서강대 로스쿨 교수

만물은 변한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고, 메마른 가지에서 새잎이 돋는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대지가 다시 살아나고 산천은 녹색의 잎으로 덮인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침침해진 눈과 뻐근한 어깨 그리고 시큰거리는 무릎을 쓰다듬으며 기력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낀다. 청년이 중년이 되는 시간 가운데 아이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새 세대가 성장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주변 환경의 변화 가운데는 건물의 신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산 해운대에서 울산으로 오는 국도의 양 옆에 들어서는 고층의 빌딩과 아파트는 이 지역의 경제발전을 잘 보여준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군데군데 공지가 보이던 세종시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런 지역에 갈 때마다 세상의 변화가 참 빠르구나 하고 느낀다. 최근 전자 및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눈부시다. 컴퓨터, 전화기, TV, 카메라, 카세트테이프 레코더 등 현대 문명의 이기가 휴대폰이라고 하는 조그만 전자기기 속에 들어와 있고, 정보통신 기술도 4G를 넘어 5G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휴대폰 안에서 살고 있다. 버스를 타고 들여다보고, 밥을 먹으며 터치를 하고, 길을 걸으며 코를 들이박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과 만나서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각자의 휴대폰과 눈을 맞추고 있다.

물질세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인간관계도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 학교의 전통적 사제관계는 사라진지 오래고 이제는 그냥 권리의무를 서로 부담하는 관계만 남았다. 회사의 부하는 더 이상 명령할 대상은 아니고 협력하고 대화하여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가족관계는 어떤가? 많은 형제들이 있던 대가족은 해체되고 하나 혹은 둘의 애지중지 하는 자식이 가정의 중심이 되었다. 부모가 늙고 병들면 자식이 모시는 일은 옛말이 되고 실버타운이나 요양원에 의탁하고 있다. 팔촌까지는 한 자리에 모여 제사를 지내던 풍습이 사라지고 사촌까지가 진정한 친족인 것처럼 여겨진다. 앞으로 제사문화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예상도 쉽지 않다.

그러나 빠르게 혹은 천천히 오는 변화 가운데에도 변화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고 하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명제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늦게 변한다’고 해야 할 듯하다.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다. 이는 인류문명이 지속되는 한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사람은 먹어야 산다. 이도 유기체인 인간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 한 부정할 수 없다. 먹고 사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연명하는 수준을 넘어 남들처럼 좋은 집에 살고, 멋진 차를 굴리고, 가끔 여행을 가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생존경쟁이 심화되다 보니 내 가족이 아닌 사람은 가끔 모두 적으로 보인다.

세상은 이제 내편과 남의 편이라는 이분법으로 분해된다. 유튜브에서는 다른 편에 선 사람들과 조직에 대한 비판이 난무하고, 광화문에는 우당과 적당이 각각 나누어져서 시위를 한다. 헌법은 언론과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우리가 큰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성과이자 앞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기본권이다. 그러나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남에게 똑같이 대접하라”고 하는 황금률을 상기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며 존중받아야 한다. 나의 편이 아니라고 해서, 나와 생각이나 사상이 조금 다르다고 하여 무조건 비난하고 적대시할 일은 아니다.

경쟁, 성과, 연봉 이런 말은 모두 듣기 좋다.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바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 가치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생명존중, 이웃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대상보다 언제나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며, 가장 늦게 변해야 하는 고귀한 정신이 아닌가 한다. 김광수 서강대 로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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