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걸수 수필가

고향하면 어머니와 ‘소치는 목동’들이 생각난다. 이맘때면 소를 몰아 산으로 갱 빈(강변)으로 누비며 소는 팽개쳐놓고 우리들은 놀이에 흠뻑 빠진다. 남의 밭 감자나 고구마를 몰래 캐서 구워 먹기도 하고, 어떨 때는 수박이나 복숭아 서리를 하는 등 별 죄책감도 없이 나쁜 짓도 많이 저질렀다. 가끔씩 소를 잃어 온 산천을 뒤지기도 하고, 끝내는 동네사람들이 동원되어 칠흑의 밤에 소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어머니는 마당에 멍석을 깔아 밀 장국을 끓여놓고 우리들을 기다린다. 모깃불을 피우고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레 판에 앉아 저녁을 먹는다. 여동생이랑 멍석에 누워 이슬에 맺혀 옷가지가 눅눅할 때까지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수를 보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고향을 떠나 온지 어언 40여년의 세월이다. 그렇다고 천리타향도 아닌 지척에서 살고 있지만 엄연히 내가 태어난 고향집은 아니다. 오년 전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가 안 계신 고향은 옛 고향이 아닌 것 같다. 언제나 변함없이 반겨주던 어머니의 부재는 쓸쓸함을 넘어 적막감으로 변하고 있다. 대나무로 집과 산의 경계를 이루었던 옛 집은 내 유년과 아련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성장했던 곳이다. 옛 집은 형님이 몇 년 전에 헐어버리고 새집으로 지었다. 고향을 들릴 때마다 내 마음속의 옛 집만 떠올릴 뿐 안타까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고향집 길목 언덕배기에 어머니가 묻혀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잠들어 계셨던 아버지를 어머니와 합장을 하셨다. 찻길이 닿은 곳이라 고향동네를 오갈 때 마다 산소에 들려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죠. 하며 절이라도 올릴 수 있어 다행이다는 생각이 든다.

“산천은 의구한대 인걸은 간데없다”는 말은 세월이 갈수록 가슴에 와 닿는다. 고향집에서 보면 우뚝 솟은 신불산과 잘록한 간월재는 언제나 변함없지만 아버지 친구 분들은 다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다닐 때 그분들과 바둑도 많이 두었다. 사회 첫발로 고향 면사무소에 발령을 받았을 때 잘하라고 격려 해 주시던 아버지친구 분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다.

동네경로당을 찾으면 구순내외의 어머니또래 친구들뿐이다. 밥 먹고 가라며 손을 잡고 어머니얘기를 할 때면 가슴이 복 받치고 눈시울이 붉혀진다. 그래도 이 분들이 계시기에 내 고향의 정취가 살아있지만 몇 년이나 더 이어질까. 개구쟁이 또래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명절이 오면 호롱불아래 밤을 지새우며 사탕과 건빵 따먹기를 했고, 여름이면 솔 정자에서 영감탕구(비석치기)를, 갱 빈에서는 앉은뱅이 물장구를 쳤고, 비오는 날에는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개시도랑에 싸리소쿠리를 대놓고 발을 동동 굴렸다. 同舍(동사)에서 강통차기, 다이 꽁(야구)놀이, 숨바꼭질, 땅따먹기 등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소 먹이러 가서는 떼잔디가 깔린 넓은 미뚱(무덤)에서 짚 공으로 공차기를 했고, 때로는 서너 살 아래 동생들을 모아놓고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추억과 부끄러운 기억들도 상존하고 있는 내 고향은 고산준령으로 병풍처럼 둘러싼 영남의 알프스다. 저 멀리보이는 능선에는 이른 봄까지 殘雪(잔설)의 풍광들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고향하면 어머니와 ‘소치는 목동’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강걸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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