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환의 숲김주영作 - 척박한 현실에 발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그러나 한없이 투명한 푸름과 눈이 부실만큼 화려한 붉음의 조화가 몽환적으로 펼쳐지는 무릉도원을 품고 있기에 삶은 여전히 아름답다.

어머니는 그 옛날
농부였던 것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 꽃밭에서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남은 생 행복했으면 좋겠다.

고향집 텃밭에는 언제부턴가 채소가 사라졌다. 어머니는 구부정한 허리 통증 때문에 밭일을 하지 못한다. 60여 년 동안 해오던 농사를 접기 시작하면서 점점 약해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절대 그만 두지 않을 것 같았던 농사를 그만두면서 어머니는 부쩍 외로움을 타는 듯하다. 팔십 평생 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맘때면 고향에선 모내기가 한창이다. 모든 것이 기계화 되어 사람의 손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 옛날 농사는 마을 일로 늘 바쁜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농부였다. 이른 새벽 마을 아낙네들이 돌아가며 해주던 품앗이는 고달픈 어머니 삶의 일부였고, 눈 뜨는 시간부터 등허리를 땅바닥에 붙이는 순간까지가 어머니 노동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어린 내 눈에는 일 밖에 모르는 어머니였다. 언젠가 내 책에서 그렇게 썼다. 일 밖에 모르는 농부 아닌 농부로서의 어머니만 존재했다고. 뭉툭한 어머니의 손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 친구 어머니들은 잔뜩 멋부리며 학교에 왔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 입었는지도 모르는 빛바랜 치마저고리에 허리에 동여맨 끈이 너무 어색했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일만 하느라 해준 게 없다고 투정부렸던 몇 십 년의 시간들이 불현듯 지나간다. 그리고 깊은 후회를 한다. 왜 나는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뭉툭한 손가락 끝의 손톱은 늘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밤마다 저린 손을 방바닥을 툭툭 치며 고스란히 고통을 견뎌내셨던 것을 난 미처 깨닫지 못한 못난 딸이 되었다. 단 한 번도 어머니의 그 고되고 쓸쓸한 농부 생활을 위로해 드릴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마음이 불편하고 한없이 죄송하다. 죄책감이나 죄인 같은 이 심정을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 딸을 키우면서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나도 어느 순간, 내 딸의 어머니가 되어 되돌아볼 삶이 어떻게 비춰질까도 생각해본다. 일주일에 한 번 홀로 고향집에 계신 어머니를 찾는다. 갈 때마다 켜져 있는 TV속의 사람들이 자식보다 오히려 낫다, 라는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핸드폰 속 음성이나 TV속의 사람들 모습과 하는 얘기들을 듣고 보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어느 날, 남편이 부탁을 했다. 알록달록 색깔별로 꽃이 핀 화분 세 개를 샀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무엇 때문인지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읍내 꽃집에 들렀다. 향이 짙고 밝은 색깔의 꽃이 활짝 핀 화분을 골랐다. 고향집으로 갔다. 그때서야 남편은 말했다. TV를 보면서 알았다, 고. 홀로 계신 어르신이 꽃밭을 보고는 그렇게 좋아하더라, 는 것이다. 고향집 어머니도 언젠가 꽃을 보고 미소를 짓던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고향집으로 가는 내내 생각했다. 어머니와 꽃밭이라. 어색하다. 평생 농사꾼이었던 어머니와 꽃이 나의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고향집엔 어머니가 안 계셨다. 사 온 화분들을 어머니가 바라봤을 때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놔두었다. 물을 주고, 색깔별로 배치를 해뒀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딸이 할머니 밭에 뿌려준다고 사 둔 꽃씨를 내 가방에서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넣어 두었던 꽃씨였다. 매번 잊어버리고 돌아섰다. 텃밭 구석구석 골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덮었다. 어머니가 잘 보이는 곳에 골고루. 때마침 비가 내렸다. 어머니가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이제 고향집 갈 때마다 어머니의 텃밭에 예쁜 꽃들을 심어볼 생각이다.

텃밭 속에 꽃씨를 심어놓고 밭으로 갔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언니가, 오빠가 모판을 떼어 논두렁에 옮기고 있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고 앉아 계셨다. 살며시 다가가 꽃 화분 세 개를 갖다 놓고, 텃밭에 꽃씨를 심어뒀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신다. “그래, 고맙다. 잘했다. 막내야, 고맙다.”

어머니는 그 옛날 농부였던 것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는 것을 난 이제야 알았다. 언제쯤 어머니의 꽃밭이 화려하게 변신할까. 궁금하다. 그 꽃밭에서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남은여생 행복했으면 좋겠다.

▲ 김순희씨

■김순희씨는
·2001년 <오늘의문학> 수필 등단
·울산문협, 수필가협 회원, 꽃바위작은도서관 사서
·제35회 울산예총 문인부문 울산광역시장상 수상
·수필집 <내사 핸드폰 없이는 몬살겠다>(2015)
·독서에세이 <꿈을 꾸는 사람은 열정이 함께 한다>(2018)
 

 

 

 

▲ 김주영씨

■김주영씨는
·대구예술대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15회(서울 울산 대구 부산 안성 김제)
·아트페어 8회 외 단체전 250여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등 공모전 다수 입상
·한국미협, 울산미협, 울산구상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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