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포럼, 흑백사진 4점 소개
벼랑길 현재 데크 산책로 바뀌어
문화재 훼손 경각심 갖는 계기로

▲ ①유적의 원경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 지금은 자동차가 근처까지 들어가고, 데크 산책로도 깔려있어 접근하기가 어렵지않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암각화에 이르려면 위험하게 깍아지른 절벽을 따라 벼랑길을 넘어야 했다. 최근 반구대포럼(상임대표 이달희·울산대 교수)이 그 옛날의 벼랑길 모습을 보여주는 흑백사진을 공개했다.

▲ ①유적의 원경

첫번째 사진 속 주인공은 울주 대곡리 반구마을 주민인 윤동규씨다. 서울 사람인 윤씨는 1967년 울산으로 이주했고, 이듬해인 1968년 이 사진을 찍었다.

윤씨가 선 자리는 대곡천을 가운데 두고 뾰족히 튀어나온 반구대의 끝자락과 마주하는 곳이다. 윤씨가 손을 짚은 바위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 ③새겨진 글씨의 탁본

사진 속 울퉁불퉁 표면이 고르지않은 벼랑길은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달려졌다. 현재는 바닥이 평편하게 넓혀졌고 그 위로 포장까지 마무리 돼 자동차가 드나드는 도로가 됐다.

사진에서는 잘 표시가 나지않지만, 윤씨가 서 있는 벼랑길 벽면에는 ‘순치12년(順治十二年·1655년·조선효종6년)…’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윤씨가 사진을 찍은 지 4년 뒤인 1971년 당시 문명대 동국대 교수는 반구대 암각화를 학계에 최초 보고했고, 1976년에는 황수영 교수의 <한국금석유문>(1판)를 통해 총 11행 37자(판독불가 6자 포함)의 벼랑길 명문을 ‘반구대연로개수명’(盤龜臺硯路改修命)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두번째 사진은 그 보다 27년 뒤 촬영된 것이다. 1995년 당시 서울시립대 박물관장이던 박희현 교수가 벼랑길 절벽면에 새겨져 있던 각석을 연구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찍은 것으로, 모두 3장이다. ‘사진1’은 먼거리에서 벼랑길을 바라본 장면으로 지금의 반고서원 언저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2’ 제목은 ‘유적의 근경과 조사모습’이며 박 교수가 절벽면 석문을 관찰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사진3’은 석문의 글씨를 탁본하는 과정을 담고있다.

▲ 1968년 울주 대곡리 반구마을 주민 윤동규씨가 촬영된 사진과 1995년 당시 서울시립대 박물관장 박희현 교수가 촬영한 ‘①유적의 원경’ ‘②유적의 근경과 조사 모습’ ‘③새겨진 글씨의 탁본’(왼쪽부터 시계방향) 사진.

박 교수는 이 때 바위에 새겨진 글자 수가 문명대 교수 보다 하나 더 많은 38자이고, 그 중 판독이 불가한 것은 2글자 뿐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일명 ‘반구대연로개수명’ 석각은 한동한 잊혀져 있다가 2010년 울산대박물관의 연구로 지역사회에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신형석 울산박물관추진단 학예사는 <울산발전>27호(울발연 펴냄)에 ‘1655년 연로(벼룻길)에 대한 개수공사가 이뤄졌고, 그 비용을 관청이 아닌 일반인이 대었으며, 시주 및 화주 등 불교적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다 반구대 주변에 있었던 반고사와 연관됐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다만 신 관장 연구에 따르면 판독 불가능한 글자가 10글자로 늘어나 있다. 박 교수의 연구 이후 불과 15년 만에 벼랑길 환경이 바뀌면서 석각의 마모 역시 급격하게 진행된 것으로 유추된다. 이후 대곡박물관장이 된 신형석 관장은 <울산대곡박물관>(2015)의 상설전시도록에 <한국금석유문>(4판)의 내용과 함께 이를 재차 소개하기도 했다.

이달희 반구대포럼 대표는 “지금은 차량이 진입하지만, 옛길은 바위계단식 오솔길이었다. 자칫 몇년새 문화재와 주변환경이 급격하게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번 자료공개가 울산대곡천암각화 유적보존에 경각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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